코소보·이라크·리비아..북한이 미국을 못 믿게 된 사태 셋
강혜란 2017. 10. 21. 13:00
1999년 유고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공습을 주목하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을 종종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평한다. ‘완전한 파괴’와 대화 등 다양한 옵션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황에서 종종 예기치 못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북한 김정은 정권은 한결 같을 정도로 강경 일변도다. 20일(현지시간)에도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아메리카 국장은 "미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한 조선의 핵무기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러시아 모스크바 국제 핵 비확산 회의)는 원론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강경 자세 저변에 1999년 ‘코소보의 교훈’이 드리워져 있다는 분석이 최근 미국 아·태 외교지 ‘디플로매트’에 실렸다. “지금 한반도 대치상황을 초래한 북한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의 주요 성향이 99년 코소보전쟁의 직접적 결과”라는 과감한 주장이다. 저자 사무엘 라마니는 워싱턴포스트 등 매체에 정기적으로 외교관련 글을 싣는 옥스퍼드대 박사과정 연구자다.
이 분석이 흥미로운 것은 이제껏 북한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여겨져 온 나라가 주로 이라크·리비아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99년 코소보 사태 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을 당했던 세르비아나 그 전신인 유고슬라비아와 북한과의 관계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과연 두 나라 사이엔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코소보 사태가 북한 외교의 터닝포인트’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걸까.
1977년 8월24일 북한 노동신문은 1면 헤드라인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이오씨프 브로즈 찌또 동지를 열렬히 환영한다’고 썼다. 이 날은 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래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해온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날이다. 노동신문은 티토가 30일 출국할 때까지 날마다 그의 동선과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소개했다.
세르비아와 각별했던 북한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영고성쇠를 주의 깊게 지켜봤을 것이다. 99년 5월 일본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토 공습 개시 전에 밀로셰비치에게 친서를 보냈고 4월 하순에는 전문가로 이뤄진 군사조사단을 유고에 파견했다. 이들은 나토의 북한 공습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유고의 전투방식, 공습에 대한 대피방법, 나토 보유 무기의 파괴력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코소보 사태가 북한에 남긴 트라우마는 이뿐이 아니었다. ‘디플로매트’ 기고에 따르면 코소보 사태는 3가지 측면에서 북한의 외교 및 안보 정책에서 전환점이 됐다.
두번째는 핵무기가 북한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미국이 주도한 나토의 군사개입은 지상전을 배제한 채 공습 위주로 이뤄졌는데 북한은 이를 통해 미국이 제2의 베트남전과 같은 ‘수렁’을 원치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따라서 미국의 공습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력, 즉 고도 미사일 체계와 핵무기를 갈등의 최고 수위까지 개발하는 것이 군사 개입 및 체제 전복 위험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최고 수단이라고 결론내렸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지난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7 신흥경제 5개국(BRICS·브릭스)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풀뿌리를 먹는 한이 있어도 체제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이라크·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결과적인 체제 전복을 들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역시 이 같은 결말일 것이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외교적 해법을 도출하려고 할 때 ‘코소보의 교훈’은 북한과 미국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 티토 대통령과 김일성의 '브로맨스'
티토의 방북은 2년 전인 75년 6월 김일성의 유고 방문에 대한 답방 성격이었다. 지금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로 여겨지지만 과거 김일성 집권기에는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다수의 국제행사에 지도자가 참석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냉전기 티토와 김일성의 유대관계는 각별했다. 전후 ‘독립국’을 통치해왔다는 개인적 공통점과 함께 북한과 유고가 둘다 비동맹 공산국가라는 점도 통했다. 김일성은 80년 5월 티토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 코소보 사태 때도 北, 밀로셰비치 지지 두 나라의 끈끈한 관계는 80년대 말 유고 공산국가 몰락과 연방 해체 이후에도 지속됐다. 90년대 북한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신유고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 공화국 남부 자치주인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해 국제적 고립 위기에 처했을 때도 북한은 세르비아에 대한 외교적 지지를 거두지 않았고 무역거래도 계속했다. 98년 본격화한 코소보 내전 사태는 99년 3월24일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군의 베오그라드(세르비아 수도) 공습으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69일 간의 공습과 혼란, 피의 살육전은 6월 9일 세르비아의 평화안 수용으로 막을 내렸다. 밀로셰비치는 이듬해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국민 시위에 못 이겨 하야하고 이후 반인륜범죄 등 혐의로 기소·투옥됐다.
━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될 지 모른다" 먼저 북한과 중국의 관계 복원이다. 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후 북한과 중국은 전반적으로 소원한 관계가 됐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북한의 불신과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중국의 우려도 작용했다. 뜸했던 양국 관계는 98년 김정일이 권력을 공식적으로 승계한 이후 회복되기 시작했다. 코소보 사태는 이즈음 벌어졌다. 직후인 2000년대 들어 북·중, 북·러는 정상들이 상호 방문하는 등 눈에 띄게 교류가 강화됐다. 북한의 이러한 외교 노력 저변에 “제2의 유고슬라비아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 "미국의 공식 성명 액면 그대로 못 믿어" 마지막으로 코소보전은 북한에 비타협적인 대미 저항과 불신만이 살길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북한은 코소보전을 통해 미국과 나토가 여차하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앞서 보스니아 사태를 종식시킨 95년 데이턴 평화협정 등 미국의 공식 성명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미국 외교의 이중성에 대한 북한의 인식은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11년 무아카르 카다피 정권의 전복으로 이어진 리비아 군사개입에서 더 분명해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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