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청춘의 결핍' 채우러 동해 갔지만.. 열망은 수평선 너머 '가물가물'

이주엽 작사가 2017. 10. 2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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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허기지고 목마른 청춘들을 향해 송창식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고래 잡으러”라고 노래했다. / 조선일보 DB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송창식 '고래 사냥" 중

광활한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 집채만 한 고래가 아니고서야, 어찌 청춘의 꿈에 견주겠는가. 삶이 권태와 염증으로 가득해 무작정 동해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거기서 시원(始原)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고래의 푸른 이야기를 만나면, 삶의 비애조차 하찮은 부스러기로 잊힐 것이라 믿었다. 동해는 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청춘의 성소였다. 거기에 이르면 어제는 밀려가고 비로소 신생(新生)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송창식이 부른 '고래 사냥'의 저 호쾌한 선동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청춘이 동쪽 끝으로 향했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그렇다. 지금이 그때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떨치고 동해로 가보자. 잃어버린 꿈의 기억이 숨 쉬는 그곳으로.

어느 청춘인들 허기지고 목마르지 않을까. 밤새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청춘의 결핍을 채울 수 없다. 청춘은 필요 이상의 욕망이 몸 안에 갇힌 시기다. 불안과 좌절의 짐짝이 언제나 무겁게 얹혀 있다. 그러니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다. 그 슬픔을 안고 각자 섬처럼 떠있다. 슬픔의 색깔은 비슷하나, 견디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모두가 돌아앉아" 있다. 그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송창식의 샤우팅이 들려온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꿈의 길은 낮게 펼쳐져 있으니, 특급열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삼등열차라야만 꿈의 지도를 따라갈 수 있다.

"우리들 사랑이 깨"지거나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날, 도망치듯 도시의 밤을 떠나 동해의 새벽에 이르면 비린 날것의 꿈과 마주한다. 그 꿈의 주소지는 바다가 아니라 수평선 너머에 있다. 멀고 아득하고 희미하다. 거기서 "신화처럼 숨을 쉰"다. 꿈을 향한 열망은 내 몸 속에서 홀로 타오를 뿐, 끝내 수평선 너머로 건너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꿈과 사랑은 '영원한 부재'다.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됐던 이 노래는, 70년대 청춘의 일탈과 자유를 꿈꾸게 한 '시대의 초상' 같은 곡이다. 질식할 것 같았던 억압의 시대에 정신의 숨통을 텄다. 그 시대엔 당연히 금지곡이었다. 자유를 상상하게 한 죄로. 가사 역시 원작자 최인호가 썼다. 그는 청춘의 꿈을 저 거친 동해 바다에 닻 내리게 하고, 고래를 가요의 메타포로 처음 끌어들였다. 그는 소설만큼 가사에서도 탁월한 필력을 자랑했다. 남긴 가사는 많지 않지만, 모든 작품이 기존 노래와 결이 다른 특별한 감성을 보여줬다.

그가 가사를 쓴 송창식의 다른 노래 '꽃, 새, 눈물'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그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 떨어져서 꽃이" 되고, 그 꽃을 꺾어 든 나는 창가에서 새처럼 노래한다. 그 노래 속으로 봄이 가고 다시 꽃이 진다. 인연의 슬픔을 이렇듯 영롱하게 풀어낸 그의 감각이 한 시대를 풍미한 문사답다. 역시 송창식이 부른 '밤 눈'의 이런 대목은 어떤가.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다." 노래의 공간인 밤과 눈과 꿈이 어지럽게 섞이는 먼 곳은, 또 다른 시원이다. 거기 묻혀 있는 "옛 얘기" 역시 순도 높은 꿈에 관한 것이리라. "얼지 않은" 그 얘기가 있으면, 추운 겨울 밤도 견딜 만한 것이다. 송창식의 목소리 안에 최인호의 영혼이 깃든 이 장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비경이다. 단언컨대 둘의 만남은 대중음악사의 축복이다.

청춘의 꿈은 푸르고 비리다. "가슴에 하나 가득 슬픔뿐"이던 뜨거운 신파, 날것의 청승 안에서 머무른 한 시절이 있었다. 아, 헛된 꿈과 사랑, 그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세월이여,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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