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구수한 청국장 한 입.. 몸에 박힌 기억들이 살아나다

정동현 대중식당애호가 입력 2017. 10. 2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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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정동현 제공

드문드문 어둠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돌담길을 걸었다. 밤에도 불 꺼지지 않는 인사동, 이 나라인지 다른 나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그곳을 떠나 횡단보도 하나 건너니 높은 돌담이 있는 아늑한 길이 나타났다. 들떴던 사람들도 그 길 위에 오르면 얌전한 고양이처럼 온순해졌다. 돌담길을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폭죽 터뜨린 것처럼 밝은 도시가 민얼굴을 내비쳤다. 차라리 어둠이 좋았다. 가로등 대신 노란 형광등 불빛이 좁은 길을 비췄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별궁식당'이라고 쓴 낮은 간판이 땅바닥에 붙어 빛났다. 그 빛을 따라 발길을 틀었다. 살짝 열린 대문이 있었고 그 틈으로 시멘트 깔린 마당이 나왔다. 고드름 녹은 듯 차디찬 물이 쏟아지던 우물물을 틀어놓고 놀던 어릴 적 시골집 같았다. 한참 물을 끼얹고 놀고 있으면 할머니는 낮은 상을 마루에 올리고 나와 동생을 불렀다. 늘 굽어 있던 허리와 주름지다 못해 곱은 손, 앓는 소리를 내어야 간신히 펴지던 무릎으로 할머니가 차린 밥상 앞에서 우리는 작은 짐승들처럼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했다.

옛날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작은 마루에 걸터앉아 신을 벗었다. 너른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사람이 여럿 있었다. 밖에서 보이던 젊은이들은 없었다. 대신 몇몇 나이 찬 이들이 반찬을 상에 깔아두고 느긋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 와서 메뉴 고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모든 상 위에 올라가 있는 청국장(8000원·사진)을 기본으로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그다음 '무주구천동에서 난 콩으로 담근 된장과 장모님의 손맛으로 만든 음식'이란 설명이 붙은 메뉴를 찬찬히 읽으면 된다. 청국장 하나로는 아쉬워 도토리묵(1만원)과 파전(1만2000원)도 따로 청했다. 어릴 때처럼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대신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음식 나오기를 기다렸다.

인사하는 태도만 봐도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듯, 식당 찬 깔리는 모양새만으로도 맛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맵지도 짜지도 않게 조린 꽁치조림과 한여름을 난 열무김치, 빨간 도라지나물이 하나하나 자리를 잡았다. 반찬에서는 달콤한 말로 현혹하지도, 거친 말로 마음을 할퀴지도 않는 친구와의 담담한 대화 같은 맛이 났다. 부추와 오이, 양파와 당근을 채 썰어 함께 무친 도토리묵도 비슷했다. 나무의 연한 속살 맛이 나는 도토리묵을 입에 머금었다. 실파와 오징어, 양파를 달걀 푼 밀가루 물에 버무려 부친 두툼한 파전도 크게 찢어 입에 넣었다. 청국장이 상에 올라왔다. 익어가는 들판을 닮은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몸 깊숙이 박힌 기억들이 그 냄새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꼬리를 쳤다. 나를 부르던 것들, 진정으로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들은 늘 이렇게 고요한 바람처럼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오래된 일기를 들춰보듯 천천히 아껴가며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방구석으로 가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홑이불을 덮고 앉아 있었다. 다른 중년의 객(客)이 그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건강하시죠?"

노인은 "잘 드셨냐"고 되물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는 내 속에 오래된 음식을 품고 생각했다. 순한 것들,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약한 것들, 그것들은 사라질지언정 잊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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