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전학자의 브랜드 인문학] (17) 마음을 치유하는 건, 결국 색이다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2017. 10. 2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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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베네통

베네통의 옷은 단순하지만 과감한 색채로 유명하다.

브랜드는 감각이다. 만약 병 깊었던 몸이 건강해지는 데 감각 회복까지 포함시킨다면 베네통은 회복의 수단으로써 색채감각을 선택했다. 브랜드 베네통은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색채감각을 패션에 유감없이 발휘한다. 감각의 힘은 각자가 체험하게 되는 색채로 지속될 뿐이다.

■ 색채감각과 상처의 치유

건강이 회복될라치면 입맛부터 살아난다. 그저 맵고 짜던 음식이었는데 불현듯 그 세밀한 맛까지 느껴진다면 당신의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 뜻밖에도 미각처럼 색채감각을 몸의 회복과 연관시킨 시가 있다.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서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 데 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조용미 ‘초록을 말하다’에서)

시어에 유난히 색을 많이 표현하는 시인은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에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록이라는 한 가지 색은 시인이 건강을 되찾자 여러 초록으로 보였던 것. 이 시에 따르면 몸의 회복은 색채감각을 살려 놓는다. 반면 다음 연에서는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다. 색채감각이 살아나면서 몸이 회복되었던 것. 전후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몸의 회복과 색채감각은 연관이 깊다는 건 분명하다. 지난한 앓이가 끝나면 그때 들어오는 쪽빛 하늘, 눈을 들어 그 색을 보면 이전에 감각하지 못했던 빛깔이다. 당신은 가끔 회복을 바라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새로운 쪽빛을 찾는 것이리라.

■ 마치 색채에 굶주린 것처럼

2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이탈리아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서 차츰 불황을 벗어난 듯 이탈리아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때 나타난 특이한 현상 하나. 전에 보지 못했던 섬세한 색채감각이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에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2차 세계대전 후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던 열 살의 소년 가장이었다. 그는 세 명의 동생들,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갖은 고생 끝에 스무 살이 된 루치아노는 여동생 줄리아나가 짠 스웨터에 ‘트레조리’라는 브랜드를 붙인다. 매우 단순하지만 노랑, 녹색, 밝은 청색 등 다양한 색채를 강조한 스웨터를 만들어 젊은이들의 생동감을 자극했다.

1965년 스웨터 사업이 안정되면서 루치아노는 이 브랜드를 자기 가문 이름인 ‘베네통’으로 바꾼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손님들은 마치 색채에 굶주렸던 것처럼, 그리고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생동감을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이 앞다퉈 우리의 알록달록한 스웨터를 사갔다.”

베네통이 만드는 스웨터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접해 보지 못한 색을 지녔고 그들을 폭발적으로 매혹시켰다. 루치아노 베네통은 결국 브랜드의 정체성을 ’색채’에 맞추게 된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색채감각이 살아난 것을 직접 목격했고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색’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 색채감각이란 무엇인가

다른 스타일의 의류도 많았을 터인데 유독 단일한 형태의 스웨터가 색채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질 들뢰즈는 또 하나의 감각인 색채감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하학은 ‘뼈대’이고 색채는 감각, 즉 ‘착색 감각’이다. (…) 비록 착색적이라도 감각은 일시적이고 혼돈스럽다. 감각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명쾌하지 않다. (그로부터 인상주의에 대한 비난이 나온다.) 하지만 뼈대는 더욱더 불충분하다. 뼈대는 추상적이다. 기하학을 구체적으로 혹은 느껴진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감각에 지속과 명확함을 주어야 한다.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에서)

일반적으로 그림은 형태와 색채로 표현된다. 들뢰즈는 형태를 ‘기하학’ 내지는 ‘뼈대’라고, 색채를 ‘(착색)감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동안의 색채는 “비록 착색적이라도 감각은 일시적이고 혼돈스럽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베네통은 인상주의를 들어 비판한다.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색채를 잘 표현했지만 그 화가들의 “(착색)감각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명쾌하지 않다”는 것.

그러면 그림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요소인 형태는 어떨까? “뼈대(혹은 기하학)는 더욱더 불충분하다. 뼈대는 추상적이다.” 여기서 뼈대는 선으로 표현되는 드로잉을 말함과 동시에, 소실점을 중심으로 연장선들이 필요한 기하학, 그러니까 원근법을 말한다. 선은 추상적이라 지성으로만 이해될 뿐이고, 인상주의 색채는 지속적이지도 명쾌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대상을 체험하고 감각을 명쾌하게 지속시키는 색채를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색채를 발견한다는 것

체험된 색채를 찾아내고자 베네통은 집안 대대로 몇 대에 걸쳐 염색에 종사해 온 장인들을 영입한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은 루치아노 베네통의 새로운 색채를 발견하기 위한 집념을 잘 말해 준다. 베네통의 초록색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빛깔이 아닌 전혀 다른 색채였다.

각자 체험하는 색채감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기에 종래의 고정된 염색 공정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색채를 표현할 수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의류회사들은 이미 염색된 실로 직물을 짰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이 나올 수 없었다. 기존의 통념을 깨는 혁명적 발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베네통의 기술이 후염색 기술. 염색하지 않은 단색 실로 옷을 짠 뒤 그때그때 필요한 색채로 염색하여 옷을 생산했다. 이 후염색 기술로 베네통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색채를 포착하여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고, 재고도 남지 않아 사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색채는 어떻게 발견할까? 여기서 들뢰즈의 설명을 들어 보자.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다.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에 따르면 색은 허공(공기)에서 찾는 게 아니다. 색은 ‘신체’ 속에 있다. 들뢰즈는 정물화나 풍경화와 같은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을 ‘신체’라고 한다. 그가 독특하게 ‘신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단지 “재현된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색은 그렇게 “체험된 신체” 속에 있다. 그림으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체험하고 그 대상의 일부, 곧 감각하는 신체가 된 화가에게 분명하게 남은 것이 색이다. 지금까지 보던 색과는 전혀 다른 빛깔, 색채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색은 신체 속에 있다”.

당신이 나무를 그린다고 하자. 당신이 나무를 느끼면서 그 나무의 일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게 된다. 체험된 대상을 시각화하는 데 동원된 것은 윤곽선이 아니라, ‘색채’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선은 추상적이라 두뇌로만 이해될 뿐 색채처럼 그 대상을 체험적으로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색채를 섬세하게 분별하고 발견하기 위해 관찰자가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형태로만 표현하면 대상을 느끼(또는 체험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색채를 보이는 대로만 표현할 경우 ‘체험된 신체’를 표현할 수도 없다. 들뢰즈는 세잔이 인상주의를 벗어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한다. 당신이 나뭇잎이 되었을 때 그 초록은 더 이상 지난날의 초록이 아니다. 그것이 보이면 당신의 병은 차츰 회복되고 있다.

■ 베네통의 광고 캠페인: 환기하기

베네통은 충격적인 광고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키스하는 신부와 수녀, 나체의 거식증 환자,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신생아의 모습, 남녀의 에이즈양성 문신, 에이즈 행동가의 병원 침대 사망 모습, 참전용사의 피 묻은 군복, 백인·흑인·황인종의 심장, 서로 불편한 관계의 국가나 종교 지도자들의 키스 장면 등.

베네통은 광고를 통해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는 연대감을 선언하며 ‘통합(united)’ 정신을 제창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메시지가 “유나이티드 컬러스 오브 베네통(United Colors of Benetton)”. 이 문구로 다인종, 공존, 평화, 환경보호, 인권을 환기시키는 메시지를 대조적인 색채와 함께 이미지화하여 전달했다. 파장이 큰 만큼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조명받아야 할 대상을 향해 관심을 고취시켰다.

이런 유의 광고를 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돌발표시(diagramme)’이다. 그는 이것을 “판에 박힌 것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돌발표시, 즉 베네통과 같은 광고가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돌발표시는 ‘감각적인 영역들을 연다.’ (…) 돌발표시란 그러니까 비의미적이고 비재현적인 선들, 지역들, 흔적들 그리고 얼룩들 전체이다. 사용된 돌발표시의 행위와 기능이란 (…) ‘환기하기’이다.

베네통이 사용하는 광고는 파격적이다. 이런 ‘돌발표시’는 익숙하게 보았던 이미지들에 대해서 다른 감각을 열어 놓는다. 그 표시를 통해 우리가 주의하지 않았던 대상에 대해 ‘환기’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런 ‘돌발표시’는 무질서와 혼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세계와 색채를 보도록 한다. 베네통의 광고는 또 다른 감각 영역을 열고 인간의 또 다른 빛깔을 보게 하는 것이다.

■ “병 깊은 몸이 한 올 한 올 구분해 내는” 빛깔

베네통이 취한 회복의 길은 색채에서 찾은 것이었다. 당신은 몸이 회복되면서 보지 않던 하늘과 산과 바다, 그리고 들판을 보게 된다. 색에 대한 탐구도 세밀해져서 조용미 시인의 말마따나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는 기쁨”도 알게 된다. “한 가지 색에 깊이 들어앉은 다른 색을 발굴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까?”(‘미학적 인간의 보람과 아픔을 지나’에서)라며 새로운 색채를 발견하려는 이 시인의 집념은 급기야 또 다른 창조론을 ‘돌발표시’로 내놓는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침입했다 사라지는 걸

우리는 하루라 부른다

(…)

病 깊은 몸이 한 올 한 올 구분해 내는 빛은 대침처럼 머리에 와 박히고

물색을 두른 나무들은 모두

우두커니

희거나 검거나 붉었다

(조용미, ‘붉은 시편’에서)

이 시인의 창조론은 유독 ‘빛’에 골몰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서를 패러디하여 시인은 태초에 있던 “어둠의 세계에 빛이 침입했다 사라지는 걸” “하루라 부른다”. 빛의 침입은 “대침처럼 머리에 와 박”힌다.

만병통치를 위해 실력 있는 의사가 몸의 딱 한 군데에 놓는다는 대침. 당신에게로 와 깊숙이 박히는 대침은 ‘빛의 대침’이다. 이것은 당신의 병 깊은 몸이 회복된다는 징조다. 그리고 당신은 나무와 한 ‘신체’가 되는 ‘체험’을 한다. 색채감각이 살아난 것이다. 그랬더니 결국 종전에 보지 못했던 나무의 색채를 발견했다. “물색을 두른 나무들은 모두/우두커니/희거나 검거나 붉었다.” 그래서일까? 성서는 홍수로 멸망했던 세상에서 인간은 새로운 색채의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는 것’을 보고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주목한 색채, 판에 박히지 않은 새로운 색채 발견, 그 색채를 자유롭게 표현할 후염색 기술, 세상에 대해 새로운 색채를 갖도록 하는 돌발적인 광고. 베네통은 색채로 몸의 회복을 소망한다. 브랜드는 감각이다. 만약 몸의 회복에 감각까지 포함시킨다면 베네통은 회복의 수단으로 색채감각을 선택했다. 브랜드 베네통은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색채감각을 패션에 유감없이 발휘하여 또 다른 신체가 되라고 우리를 매혹한다. 감각을 통해서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체험된 신체”가 된다. 회복에는 색채감각이 살아난다.

이번 주말엔 당신만의 색채를 발견하자. 하늘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病 깊은 몸이 한 올 한 올 구분해 내는” 회복된 감각의 힘은 각자가 체험하게 되는 색채로 지속될 테니까.

<김동훈 서양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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