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흑인이 역설적으로 까발린 미국 치부

백승찬 기자 2017. 10. 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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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배반
ㆍ폴 비티 지음·이나경 옮김 |열린책들 | 408쪽 | 1만3800원

<허클베리 핀>의 삽화. <배반> 속 위선적인 지식인 포이는 <허클베리 핀>의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바로잡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본을 쓰려한다.

대법원 선고를 앞둔 주인공이 재판의 의미와 기대를 얘기하다가, 법정에 오기까지 느꼈던 미국에 대한 온갖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동물원 고릴라가 새끼들을 살피는 모습이 “대통령답다”고 말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더니(버락 오바마를 빗댄 인종차별적인 농담), 난데없이 변호사를 흉보다가, 다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31쪽에 걸친 프롤로그만 봐도 <배반>(원제 The Sellout)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말하긴 거창하고, 차라리 요설이다. 수다스러운 화자는 로스앤젤레스 남쪽 디킨스라는 가상의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겪은 일들, 만났던 사람, 떠오른 생각들을 내키는 대로 늘어놓는다. 해당 문화권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코드들이 많아 읽는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하다가도, 어느덧 적응이 돼 독서를 이어간다. 역자가 200여개에 달하는 각주로 이해를 도왔다.

1인칭 서술자인 주인공이 법정에 선 이유는 21세기 미국에서 노예제를 부활시키고,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하려 했기 때문. 주인공이 백인이라면 KKK단에 연계된 인종주의자라고 여기겠지만, 그는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자란 흑인이다. <배반>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설정과 이야기를 화려한 재담으로 끌고 나가며, 결국 현대사회의 한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블랙코미디다. 커트 보네거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나고 자란 흑인이었다면 쓸 법한 이야기가 <배반>이다. 실제로 <배반>의 작가 폴 비티는 보네거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심리학자인 주인공의 아버지는 성장기 화자를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한다. 예를 들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지 않는다는 ‘방관자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아버지는 거리에서 어린 아들의 돈을 빼앗고 폭행한다. 주변의 흑인들은 ‘방관자 효과’가 무색하게도 사건 현장으로 달려든다. 아이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을 도와 더 많은 돈을 빼앗기 위해.

아버지는 ‘니거 위스퍼러’였다. ‘검둥이’들이 아내를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거나, 마약에 취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해치겠다고 위협하거나, 터무니없는 자살소동을 벌일 때,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백인 경찰들의 총에 맞아 어이없이 세상을 뜨고, 화자는 농사를 지으며 간혹 ‘니거 위스퍼러’ 일도 맡는다. 화자는 과거 아역배우로 활약했으나 지금은 정신을 살짝 놓은 노인이 된 호미니를 만난다. 화자는 자살을 시도하던 호미니를 구해주고, 호미니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화자의 노예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배반>에서 주인공의 적대자는 흑인 커뮤니티의 지식인 포이 체셔다. 포이는 ‘덤 덤 도넛 지식인 모임’을 주관하는데, 이상적이고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없고 반응도 없는 일들을 벌인다. 예를 들어 포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허클베리 핀> 판본”을 중학교 필독 도서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포이는 ‘노예’는 ‘검은 자원봉사자’로, 책 제목은 <잃어버린 흑인 가족을 찾아 나선 아프리카계 미국인 짐과 그의 어린 후배 백인 형제 허클베리 핀의 욕설 없는 모험과 지적 영적 여행>으로 바꾼다. 포이가 진행하는 흑인 대상 토크쇼는 일요일 새벽 5시라는, 시청이 불가능한 시간에 방송된다. 포이는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에 사로잡힌 채 한 줌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 발버둥치는 위선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여자친구 마페사가 운전하는 125번 버스의 앞쪽 창문 아래 ‘노약자, 장애인, 백인 우대석’이라는 작은 스티커를 붙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후 125번 버스는 시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된다. 주인공은 인종분리 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백인이 아무도 살지 않는 흑인 마을에 백인 전용 학교를 세우고, 백인과 유색인의 공공도서관 이용일을 분리하려 한다.

흑인 스포츠 스타와 흑인 가수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흑인 대통령까지 나온 마당이니, 미국의 인종차별은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뿌리 깊은 편견은 무의식의 수면 아래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용솟음치고 만다. <배반>은 잠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던 사회와 의식의 모순들을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까발린다. 전체적으로 웃기지만 마냥 웃기도 어렵다. 소설 종반부, 흑인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보러가 엉뚱한 곳에서 웃다가 무안당하고 쫓겨난 백인 커플 꼴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원래 맨부커상은 영국 연방, 아일랜드, 짐바브웨 작가들에게만 수여됐으나, 2014년부터는 영어로 쓰인 모든 소설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배반>은 미국 작가로는 최초의 맨부커상 수상작이 됐다. 현지 출간과 번역의 시차가 적다는 사실은 동시대 타 문화권의 문제의식과 감성을 곧바로 이해하는 이득을 안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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