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그 많은 미군기지는 여전히 필요한 걸까

김유진 기자 2017. 10. 2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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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기지국가
ㆍ데이비드 바인 지음·유강은 옮김 |갈마바람 | 572쪽 |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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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독일(174개), 2위 일본(113개), 3위 한국(83개). 자국 땅에 있는 미군기지의 숫자를 기준으로 매긴 랭킹이다. 2015년 미 국방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이들 세 나라에 있는 기지를 포함해 해외에 686개의 ‘기지 소재지’를 두고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 비밀기지까지 합치면 해외 미군기지는 무려 8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기지국가>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해외 군사기지를 거느리고 있는 미국의 실태를 고발한다. 2차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해외의 미군기지는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미군기지는 환경 훼손, 강간과 살인 등 범죄, 인권 침해, 마피아나 독재와의 결탁, 성매매 용인 등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온상이 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도 기지는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비용을 초래하며, 미국을 “영구적인 군사사회”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미국 대외정책에 대한 흔한 비판서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아메리칸대 인류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바인은 6년간 세계 12개국의 미군기지 60여개를 직접 찾아 현지조사를 벌였다. 책의 부제인 ‘미국의 해외 군사기지는 어떻게 미국과 세계에 해를 끼치는가’는 그의 핵심 연구 질문이다. 바인은 현장을 부지런히 누비며 기지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전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미군기지를 보유한 한국은 책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한국은 기지가 배출한 독성물질로 인해 환경을 훼손당한 대표적 국가로 언급된다. 2006년 경기 평택시에 세계 최대 규모 기지인 캠프 험프리스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추리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사건은 주민 권리 침해의 사례로 거론된다. 2차대전 이래 미국이 미군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지지한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나라”의 목록에도 한국은 포함됐다. 전두환이 1980년 광주 학살 이후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암시했고 “국내의 정적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언급도 나온다.

바인은 특히 미군의 암묵적 용인하에 지속되고 있는 기지촌 성매매를 집중 해부한다. 기지촌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미국 연구자가 기지촌이 한국의 “경제·정치·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고 서술한 문장을 접하면 괜히 화끈거린다. 주한 미군이 주둔 초기에 일본군의 ‘위안소’를 일부 넘겨받았다고 언급한 저자는 한국 정부 관리들이 기지촌 형성에 적극 개입했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들이 떠난 기지촌에는 필리핀과 러시아, 구소련 출신 여성들이 대신 자리를 메웠다. 바인은 오산공구기지 앞 송탄 기지촌을 찾아 필리핀 여성, ‘마마상(중간포주)’, 미군,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뒤, 기지촌 성산업에는 젠더 불평등과 글로벌 경제체제의 불평등이 중첩되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특히 여성에 대한 군인 개인의 착취에만 초점을 두기보다 남성들 역시 ‘군대의 제도화된 성매매’라는 구조 아래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뿌리를 둔 제도화된 성매매가 ‘군사화된 남성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군사기지는 고대의 이집트, 로마, 중국에서도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토대였다.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기지국가의 면모를 보인 시점은 태평양전쟁 무렵이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기지국가의 원형은 존재했다. 1903년에는 쿠바 관타나모만에서 미군이 무기한으로 완전한 사법권과 지배권을 누리도록 한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은 더 많은 기지망 확보에 주력하는 동시에 기지 상설화를 추진했다. 해외에 상시적으로 수많은 기지와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다. 기지망을 바탕으로 미국은 실제 점유한 땅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정치적·경제적 힘을 행사했다. 과거 식민지였다가 미국의 ‘속령’이 된 괌, 아메리칸사모아,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는 “21세기에도 미국이 영속적인 식민지 관계에 의존하는 기지국가”임을 상기시킨다. 미군은 이들 지역에서 “여기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민주·공화 양당을 막론하고 해외 군사기지와 미군의 ‘전진 배치’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해외의 미군기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을 띤다. 규모 순으로 보면 ‘리틀아메리카’ ‘전진 작전 거점’, 그리고 ‘릴리패드’라고 불리는 안보 협력 대상 지역이다. 우리가 흔히 주한 미군기지 하면 떠올리는 모습은 리틀아메리카에 가깝다. 기지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일종의 ‘빗장 동네’다. 미국의 교외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리틀아메리카는 미국적 삶의 상징이다. 독일 서남부 람슈타인-미젠바흐의 공군기지에 들어선 대형 쇼핑몰에는 독일 기념품까지도 구비하고 있다.

저자는 미군기지가 수용국에서 발생시키는 전방위적 폐단 못지않게 미국민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선 납세자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크다. 미군 한 명이 해외에 주둔하려면 연평균 1만~4만달러가 소요된다. 군인 가족과 기지에서 근무하는 민간인 직원의 수가 50만명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해외기지와 병력 유지에 드는 비용은 연간 최소 718억달러로, 미 국방부를 제외한 모든 정부 기관이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을 상회한다.

해외기지가 진정으로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소규모 기지로 은밀하게 추진되는 릴리패드는 순식간에 큰 기지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적이다. 1992년 필리핀에서 철군한 미군은 릴리패드를 통해 클라크와 수빅 만에 복귀했다. 각국 간 기지 구축 경쟁을 부추길 위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비하려고 인근에 기지를 세웠다가, 오히려 두 나라를 군사적으로 자극하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 사드 배치로 인한 후폭풍을 겪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북핵 위기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국에 한·미동맹의 가장 중요한 축인 미군기지를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주한미군이 대북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어서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기지국가>에 담긴 넓은 시야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마침 다음달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다. 한국이 방위비를 전혀 내지 않는다는 ‘가짜뉴스’를 근거로 방위비 분담 강화를 요구해 온 트럼프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해진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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