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부족에 돌봄이 또 멀어진다

입력 2017. 10. 20. 11: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21] 가난한 아이들의 ‘제2의 집’ 지역아동센터 공간 문제 심각…
임대료 상승에 잦은 이사, 임대차보호법 보호 못 받아 경매 넘어가기도

문화제 연습이 한창인 아이들 뒤로 장명임 센터장(왼쪽 첫 번째)과 장명숙 생활복지사 교사(두 번째)가 생활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기사에 나온 어린이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민지(11)는 밥을 늦게 먹는다. 다른 아이들이 식탁을 다 떠난 뒤에도 혼자 남아 밥을 먹는다. 그때마다 동생 민형(9)이는 “빨리 가자”고 보채면서도 누나 곁을 지킨다. 민지가 매일 저녁밥 먹는 곳은 서울 강북구 수유동 ‘산 지역아동센터’다. 10월11일 저녁에도 민지를 비롯한 19명의 아이들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로 시끌벅적한 여느 가정집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센터 이전하면 아이들 불편해지는데…”

민지는 지난 2월부터 이 센터에 동생과 함께 드나들었다. 집과 센터는 직선거리로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오가는 길에 경사가 많아 버스로 10분, 아이 걸음으로 30분 넘게 걸린다. 민지의 걱정은 센터를 오가는 수고로움이 아닌 ‘돈’이다. 민지는 “버스를 한 번 타면 450원, 왔다갔다 하면 900원이니까…”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민지와 민형이는 “돈이 아까워” 이 먼 길을 걸어다닌 적도 있다. 민지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버스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걱정스러운 누나의 마음을 알 턱 없는 민형이는 휴대전화 화면에 나타난 버스 요금 잔액 4950원을 자랑스레 보여주며 웃었다. 민지의 엄마는 공황장애를 앓으며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탓에 쉽게 외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10월18일부터 센터를 오가는 민지와 민형의 발걸음이 더 길어지게 됐다. 센터가 세든 건물의 주인이 경매로 건물을 넘기는 바람에 센터가 이사를 가기 때문이다. 민지는 동생을 데리고 멀리 돌아 센터를 오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난다.

고민스럽기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민지의 친구인 은이는 센터가 집과 멀어지는 바람에 이곳에 다니는 걸 포기하고 정부가 지원해주는 컴퓨터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 11살 은이와 함께 귀가하던 8살 시연이는 언니가 센터에 더 이상 오지 않는 게 서운하다. 장명임(49) 센터장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센터 인근에 임대용 다세대주택이 있어서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 편하게 드나들었다. 센터가 이전하면 아이들이 오가는 것이 불편해질까 걱정이다.”

민지처럼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센터는 ‘또 하나의 집’이다. 일 나간 부모님을 기다리며, 텅 빈 집을 혼자 지키거나 놀이터를 배회하는 대신, 센터에 가면 즐거운 일이 많다. 학교 생활을 이것저것 챙겨주는 선생님이 있고, 또래 친구가 있고, 무엇보다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다. 현재 센터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돌봄교실’을 1~2학년에게만 제공한다. 그나마 교실은 오후 5시면 끝난다. 학교 주변에 사는 학부모 가운데 제시간에 퇴근해 아이들을 데리러 올 여력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서울 421곳 센터 중 252곳이 상가 임대

10월11일 오후 4시 ‘산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10월 27일 열릴 연합문화축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9월 새로 들어온 초등학교 1학년 명우는 최근까지 학교 돌봄교실을 다녔다. 명우의 할아버지는 이따금 센터에 찾아와 “아이를 받아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 명우를 혼자 키우는 할아버지가 오후 5시에 학교에 가서 명우를 데려오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장 센터장은 명우 할아버지가 부탁할 때마다 “이미 정원이 차 있어 아이를 돌볼 수 없다. 죄송하다”며 명우를 대기 명단에 올려놓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9살 연지가 자기보다 “어린 사촌 동생을 돌봐야 한다”며 센터를 그만둬 명우의 자리가 생겼다.

민지가 다니는 ‘산 지역아동센터’는 151번 버스를 타고 우이초등학교 후문에서 내리면 보이는 오래된 빌딩 2층에 있다. 햇수로 5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며 지역 아이들의 쉼터나 공부방이 됐다. 상근교사 2명과 시간제 교사 2명이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19명의 아이들을 돌본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학교 ‘알림장’을 챙기고, 옷이 더러운 아이들에겐 “교복을 빨아 입으라”는 잔소리도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겐 신발을 바로 신는 법이나 소변 보는 법도 가르친다.

센터와 아이들의 안온한 공존이 중단될 위기가 시작된 것은 지난 2월부터였다. 센터에 법원의 경고장이 날아왔다. 센터가 세든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내용이었다. 보증금 6천만원을 변제받지 못할 거라고도 통보했다. 현행법상 상가나 주택이 아닌 ‘지역아동센터’는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다행히 건물주가 채무를 일부 상환하면서, 2월에 진행되던 경매는 중지됐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5월께부터 다시 경매가 진행됐다. 센터는 시도 때도 없이 건물을 보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견딜 방도가 없었다. 장 센터장은 고민 끝에 이사 가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장 센터장이 먼저 찾아간 곳은 담당 구청이었다. 아동복지법 제62조에 따르면 시·군·구 등 지자체는 지역아동센터에 유휴시설을 무상으로 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청은 센터에 “유휴시설이 없다”는 답변을 전해왔다. 센터 건물이 경매로 날아간다는 소식에 방송사가 찾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일에 나와 인터뷰 영상을 찍었지만, 뉴스는 방영되지 않았다. 장 센터장은 불방의 이유를 여전히 모른다.

결국 장 센터장은 현재 공부방에서 가까운 건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보증금 1억5천만원짜리 공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현재 공부방보다 보증금이 두 배나 높지만 시설은 형편없이 열악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장 센터장은 이 건물로 센터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산 지역아동센터의 ‘원치 않는’ 이사는 한 공부방의 특수한 사연이 아니다. 주로 건물을 빌려 공부방을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 시설장들은 “공간 문제가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가 진행한 조사를 보면, 서울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421곳 가운데 252곳이 상가 건물을 빌려 운영하고 있었다. 산 지역아동센터처럼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지 않더라도, 건물주에 따라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오르기도 한다. 그 돈을 감당할 수 없는 센터들은 아이들의 불편을 감수한 채 원치 않는 이사를 해야 한다.

지난해 12월31일, 30년 동안 가난한 아이들에게 ‘제2의 집’ 구실을 한 서울 아현동 ‘나눔공부방’이 이전했다. 1987년 11월 ‘소망탁아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나눔공부방은 30년 동안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해온 아현동의 터줏대감이었다. 공부방은 아현동을 뒤바꾼 재건축 열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공부방 주변에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이주명령이 떨어졌다.

돌봄의 젠트리피케이션

김명희 나눔공부방 센터장은 이사 과정에서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 8명을 잊을 수 없다. 이전하는 공부방의 월세는 242만원으로 예전 건물의 70만원보다 3배나 비쌌지만, 평수는 49평에서 31평으로 오히려 줄었다. 1평당 아이 1명을 수용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8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구청 직원은 “출석률 낮은 아이부터 내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였다. 김 센터장은 “출석률 낮은 아동들이 오히려 돌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더 이상 공부방에 다닐 수 없게 된 아이들의 부모가 찾아와 쏟아낸 원망의 말을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아동센터의 공간 문제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지원에서도, 정부의 법적 보호에서도 논외 대상이다. 해당 센터가 위치한 기초지자체에 유휴시설이 있으면 지원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강북구청 관계자는 “구내에 유휴시설이 없어 공간 지원을 해줄 방법이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 지역아동센터가 임대차보호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관계자도 “(센터는) 민간시설이기 때문에 임대료를 지원해줄 수 없고, 전세권 설정 등기를 권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아동센터를 둘러싼 법적 사각지대에서 아이들은 적잖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ㄱ 센터장은 7년간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며 두 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두 번 모두 임대료 상승 압박을 견디지 못해 옮긴 것이다. 건물주가 찾아와 임대료 인상을 요구할 때마다 아이들은 ㄱ 센터장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 또 버려지는 거예요?” ㄱ 센터장은 “셋방살이하는 아이들일수록 집주인이 찾아오는 상황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때마다 나는 ‘절대로 너희를 버리지 않는다’고 힘줘 말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강지영 숙명여대 교수(아동복지학)도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힘든 부모님 밑에서 자란다. 그런 아이들의 경우 정서적 애착이 부족한데, 이를 잡아주는 지역아동센터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10월18일 이사를 앞둔 산 지역아동센터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함에 붙은 벌레집과 사방종이는 모두 아이들이 만든 장난감이다. 장명임 센터장은 “처음 센터를 시작하고 아무것도 없을 때 아이들이랑 가꿨던 것”이라고 말했다. 사물함과 나란히 놓인 책장에는 기증 받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글을 못 읽던 은이는 이 책들을 통해 한글을 깨우쳤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는 지현이도 심리치료를 받은 날엔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선생님 공간에도 아이들을 위한 물건만 있다. 아이들의 생활일지가 한쪽 벽면을 점령하다 못해 넘쳤고, 구급약품 상자 위에 외상이 잦은 아이들을 위한 붕대와 일회용 밴드가 놓여 있다.

거실 장롱 위에 놓인 색색의 머리끈들은 엄마가 없는 정희를 위한 것이다. 정희는 아빠와 함께 살기 때문에 머리를 묶어줄 엄마가 없다. 그걸 아는 센터 선생님들이 정희의 늘어진 머리를 “더 예쁘게 묶어주고 싶어서” 머리끈을 모았다. 머리끈이 놓인 장롱 옆에 색깔이 다른 이불 다섯 채가 접혀 있다. 아이들이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면 선생님은 이불을 펴서 아이를 눕힌다. 생활복지사 장명숙(54) 선생님은 “아픈 아이들은 좀 눕힌 뒤 다가가 어루만져주면 저녁에 다시 씩씩하게 밥을 먹는다”고 말했다.

센터 초입에 놓인 화분 속 식물은 아이들이 물을 주며 키우는 것들이다. 민지가 담당하는 화분 이름은 ‘행운볼’이고, 수현이의 화분은 ‘식물의 공원’이다. 정희의 동생 정우의 화분 이름은 ‘밤송이’이다. 화분 이름은 물을 주는 아이들이 지은 것이다.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돌보려 그만둔 연지가 키우던 화분 이름은 ‘식물나라’다.

정서적 애착도 함께 사라진다

센터를 방문한 10월11일 가을비가 내렸다. 이사를 앞둔 장명임 센터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질문에 답했다. 이날 정희는 늘 입고 다니던 짧은 바지와 빨간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센터를 찾았다. 장명숙 선생님은 쌀쌀한 날씨에 혹여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돼 정희에게 “내일은 꼭 외투를 입으라”고 말했다. 그날 명우는 알림장 쓰는 법을 배웠고, 지현이는 평소 싫어하던 멸치를 꼭꼭 씹어 먹어야 했다. 이날 센터의 밤은 마지막 귀가 학생인 희준의 엄마가 올 때까지 계속됐다.

김지혜 교육연수생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공식 SNS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