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칼럼] 대통령의 눈

배연국 2017. 10. 1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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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때 "국민의 대통령" 역설 / 적폐 청산으로 국론분열 심화 / 진실은 누구든 독점하지 못해 / '나만 옳다'는 생각 버려야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어제 일을 깜빡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 163일 전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한 자락을 기록으로 소환한다.

문 대통령 취임 연설의 키워드는 ‘국민’이었다. 무려 26번 국민을 반복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2017년 5월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 짧은 단락에서도 국민은 5번이나 등장했다.

안타깝다! 대통령이 목 놓아 외쳤던 국민은 지금 반쪽으로 갈라져 있다. 통합과 포용의 정신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청와대가 ‘적폐의 캐비닛’을 열고 각 부처가 과거 정부의 비리 색출에 나서면서 분열과 갈등의 유령이 온 나라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때맞춰 문 대통령은 세계 정상들이 지켜보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촛불’이란 단어를 10번이나 언급했다. 취임사의 국민 자리를 촛불이 꿰찬 격이다.

촛불은 빛을 밝히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한다. 그것은 태양에만 부여된 유일한 권능이다. 민주체제에서 태양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수단적 가치인 촛불이 주인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민주주의는 왜곡되고 만다. 자유와 창의와 다양성은 그날로 사망선고를 받는다. 민주주의가 ‘나만 옳다’는 독선과 독재를 가장 싫어하는 이유다.

자유민주 사상의 지평을 넓힌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에서 어마어마한 악은 타인이 지닌 진실의 절반을 소리 없이 억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실수가 편견으로 굳어지고 진실 자체는 더 이상 진실로서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온전한 진실을 알기 위해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게 철학자의 충고였다.

밀의 말처럼 진실은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내가 가진 조각과 상대의 조각을 서로 맞춰야 좀 더 완전한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그러니 내가 70%의 진실을 갖고 있더라도 타인의 30%를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설혹 1% 진실일지라도 짓밟고 묵살한다면 나의 99% 진실은 결국 독으로 변할 것이다. 나머지 1%의 진실을 보태야 비로소 100% 진실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가 거쳐 온 진보의 방식이다.

사람의 인식체계는 원래 불완전하다.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들은 것조차 온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명견(明見)을 가지려면 내가 본 것만 진실이라고 고집해선 안 된다. 타인의 생각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만 리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열린다.

배연국 논설실장
문 대통령은 “적폐 청산은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듯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집안에 쌓인 먼지를 놓고 누가 더럽혔는지 따지기만 한다면 그릇이 공중부양하고, 청소는 요원해질 것이다. 방과 거실을 깨끗이 하려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빗자루를 들어야 한다. 같은 이치로 과거의 적폐를 없애기 위해선 손은 현재에 행동하지만 눈은 미래를 봐야 한다. 그것이 평소 대통령이 강조한 명견의 지혜 아닌가.

대통령의 친구, 노무현이 존경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밝은 눈으로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국가에 반역한 남부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증오의 칼날이 아니라 넓은 가슴이었다. 1865년 3월 재임에 성공한 링컨은 취임사에서 “전쟁의 책임은 남북 양쪽에 있다. 어느 쪽도 신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소리쳤다. 그 연설이 있은 한 달 후 남부군은 항복했고 미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분열의 사고를 버리자 통합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대통령이 섬길 것은 촛불이 아니라 국민이다. 촛불이 향하는 곳은 지지 세력으로 찢어진 과거이지만 국민이 바라는 것은 모두가 하나 되는 미래이다. 촛불은 아무리 많아도 태양이 될 수 없다. 명견으로 봐야 한다. 지도자의 눈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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