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그만하시고..작가님, 제발 집에 좀 보내주세요

2017. 10. 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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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조작가의 세계

'사랑의 온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
드라마 뒤편 보조작가의 현실 다뤄

밤샘에 박봉..온갖 심부름까지
"현실은 더하다" 입모아
대본 지적·퇴근 요청은 '금기어'
장면 나눠쓰고 간접광고 떠맡기도
"그래도 버티는 건 '작가의 꿈' 때문"

[한겨레]

드라마 공모 준비로 일을 그만두겠다는 보조작가 이현수(서현진)한테 작가 박은성(황석정)은 막말을 던진다. “공모가 뉘집 개이름이니?” “주제 파악 똑바로 하고 살아, 시건방 떨지 말구!” 현수는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혼란스럽다. 작가를 존경했고 그래서 열심히 도왔다. 보조작가들을 감정받이 삼는 일도 견뎌왔다. 억울하고 서운하고 슬프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는 드라마 작가가 된 주인공 이현수를 통해 보조작가의 애환을 드러냈다. <티브이엔>(tvN)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도 주인공 윤지호(정소민)가 보조작가로 나오면서 그들의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보조작가들 진짜 저래요?

내가 샌드백인가요
드라마를 본 현실의 보조작가들은 “현실은 더 심한 작가도 많다”고 입을 모은다.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작가들이 마음이 힘들 때마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을 받아주는 게 가장 괴롭다고 한다. 보조작가 ㄱ씨는 “작가가 대본을 읽고 의견을 말해보라고 해서 얘기했는데 이후부터 차갑게 대하더니 ‘너는 태도가 불량’이라는 등 인격모독성 막말을 퍼부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보조작가가 피디와 같은 의견을 낸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는 “보조작가들은 작가의 대본에 ‘정확한’ 지적을 하는 걸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조작가를 오래 하다가 공모에 당선된 뒤 입봉을 준비하는 ㄴ씨는 “집에 가도 되느냐는 얘기는 금기어”라고 말했다. “작가님이 ‘이걸 아침까지 읽어 오라’고 해서, ‘며칠 집에 못 들어갔는데 집에 가서 읽고 일찍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너는 지금 나를 화나게 했다’며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때가 새벽 두시였다.” 이들은 “대체 어떤 지점에서 화를 내는지를 예측할 수 없다”며 “무조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아 편지를 쓰고 다음날 나가지 않는다거나, 아프다는 식의 핑계를 댄다고 했다.

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 황석정이 연기하는, 성격 괴팍한 드라마 작가. <에스비에스> 제공

차라리 비서를 고용하세요
<사랑의 온도>에서 보조작가 황보경(이초희)은 프로듀서한테 밥을 차려주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한탄한다. “시녀병에 걸린 것 같다.” 드라마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으로 꼽히는데, 현실의 보조작가들한테 힘든 모습이기도 하다. 보조작가들은 “우리끼리 모이면 ‘차라리 보조작가 한명 줄이고 비서나 가정부를 고용하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고 했다. 작가인데 가정부나 비서 역할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실 청소는 물론이고, 커피 심부름에 끼니 때마다 밥도 챙겨야 한다. “주문 메뉴도 작가가 먹고 싶은 걸로 통일하는 건 기본”(ㄷ작가)이고 “어떤 유명 작가는 보조작가한테 자기 애를 보살피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ㄹ작가).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될 프린트 용지 등을 굳이 보조작가한테 사 오게 해서 그 무거운 박스를 끙끙대며 들고 오는 것을 본 적도 있다.”(ㄴ작가)

이들은 “대본에 참여하게 되면 그나마 행복하지만, 그 역시 눈감아야 할 것은 많다”고 했다. 일일드라마의 경우 함께 회의한 뒤 보조작가들한테 장면을 나눠 쓰도록 하고 이를 작가가 다듬어서 방송에 내기도 한다. 요즘은 간접광고(피피엘)를 장면에 녹이는 것도 보조작가의 몫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도 윤지호가 “보조작가 5년차. 가장 중요한 업무는 자금조달”이라며 립스틱, 홍삼 등 피피엘을 장면에 녹여내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직업, 매뉴얼은 없나요?
이들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게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ㄴ작가는 “면접 보러 간 날 바로 밤샘을 한 뒤 이틀 뒤에 집에 간 적이 있다”며 “집에 보내지 않으니 24시간 대기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직업이든 매뉴얼이 있는데, 우리는 작가마다 다른 취향과 생활패턴에 맞춰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서는 쓰지만 현실에선 무용지물이다.

제작사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보조작가의 임금은 얼추 경력이 있으면 150만~200만, 없으면 100만~150만원 정도다. 심적 고통에 박봉까지 겹치지만 버티는 이유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 때문이다. ㄱ작가는 “입봉을 하려면 공모나 제작사를 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가가 끌어주기도 하는데다 작가와 일을 하면 현장 경험도 쌓을 수 있다”며 “모두 꿈을 이루기 위해 받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버틴다”고 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윤지호는 까탈스러운 룸메이트를 견딜 수 있느냐는 친구의 말에 “상위 1%의 지랄님들을 5년간 모신 보조작가다”라고 답한다. “보조작가를 존중하지 않는 시선이 힘들었다”는 보조작가들은 “드라마에서 작가가 보조작가들한테 했던 안 좋은 행태를 사실적으로 담은 것에 놀랐다”며 “이것이 변화의 조짐 아니겠느냐”고 희망 섞인 분석도 내놨다. 이들은 “이현수처럼 실제로 좋은 작가들도 많다”며 “어떤 작가를 만나느냐가 보조작가한테는 이 직업을 계속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며 자신들을 함께 일하는 동료로 대해주기를 바랐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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