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퍼거슨 스탠퍼드대 교수, "한국의 기본소득 시도 흥미로운 사례"

김유진 기자 2017. 10. 19. 16: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대 인류학과 교수가 19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핀란드나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실험도 높은 관심을 끈다. 그런데 유럽보다 앞서 남아프리카나 남미 등 남반구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일종인 사회 부조 프로그램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 인구의 약 44%가 하나 이상의 보조금을 받고 있는 남아공에서 아동수당이나 연금 등은 대량실업 국면에도 빈곤을 실제로 줄인 것으로 입증됐다.

30여년간 아프리카 지역을 연구해 온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대 교수(58)는 올해 1월 국내 번역된 <분배정치의 시대>(여문책)에서 이같은 흐름이 새로운 복지시스템으로 등장한 것에 주목했다. 한국문화인류학회 가을학술대회(10.20~21) 참석차 방한한 퍼거슨 교수는 19일 경향신문과 만나 “시민권이라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서 우리 옆에 있는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배의)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기본소득 논의에서 한국은 흥미로운 사례”라며 “한국이 복지국가를 20세기의 가정에 따라 만들 필요는 없다”고도 말했다. 인터뷰에는 <분배정치의 시대>를 번역한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함께 했다.

-남아프리카가 기존 서구식 복지국가 모델을 거치지 않고도 ‘부조’와 같은 길을 택한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들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부를 수 있나.

“내가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형태의 복지국가인 것은 분명하다. 남아공에서 연금은 노동에 기반하지 않은 비기여 방식으로, 특정 연령을 넘긴 시민은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아동 지원수당도 혈연이 아닌 돌봄제공자가 수령 가능하다. 여성이 혼자 아이를 키우든 동성 가족이든 국가는 상관하지 않는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혁신적이다.”

-안정적 일자리 대신 임기응변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분배 노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어떤 의미인가.

“아프리카 도시에 처음 가면 사람들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전통적인 의미의 안정된 일자리가 거의 없다. 실업자들이 담배 한 갑을 사서 한 개비씩 팔면서 조금씩 잉여를 남긴다.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생산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소득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배’가 이뤄진다.”

-‘분배 노동’이 의존성을 강화한다는 비판에 대한 견해는.

“의존성은 나쁘고 독립성은 좋다는 시각은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을 해치는 의존성이 무엇이고, 좀더 나은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소득이 없는 여성은 성적으로 착취될 가능성이 높지만, 좀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가지면 통제가능한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상호의존성이 살아있는 관계가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

-분배 권리나 ‘정당한 몫’에 대한 논의는 극우 포퓰리즘이나 이민자·외국인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 세계적 흐름에 비춰볼 때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

“사회적 지원이 절실한 사람들이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 세계 복지국가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이제는 시민권이라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서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대 인류학과 교수가 19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많은 진전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아직 북유럽식 복지 국가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본소득 논의가 성급하다고도 주장한다.

“한국이 아직 복지국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굳이 20세기의 가정을 따라야 할까. 현재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에 맞게 설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과거 세계가 작동해 온 방식을 벗어나서. 가장 시의적절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시작한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은 정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조건은.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여러 흥미로운 아이디어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배워가는 중이다.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정치에 대한 실험적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정부가 정책 추진에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까.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괜찮은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상상력의 실패’다. 1950년대처럼 아버지가 일하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과거의 사회질서로 돌아갈 수는 없다. 4차 산업 혁명 이야기까지도 나오는데, 개념적 혁명이 필요하다.”

-저서나 강의를 통해 학자들이‘반대를 위한 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꾸준히 비판해왔는데.

“‘반대의 정치학(politics of the anti-)’이 학계에 만연하다. 비판자로 자처하는 것이 학계에서는 편리하고 안전한 입장이 되고 있다. 나는 정치의 핵심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정당을 창당한다면 강령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구체적으로 답해야 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많은 성취를 얻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50여년전과 비교하면 많은 진전이 있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