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 개혁론 목표는 왕조국가 재건.. '근대 지향 實學' 없었다"

이선민 선임기자 2017. 10. 1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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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경제사 관점에서 개혁론 분석..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 출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개혁론은 중앙집권 확립과 부국강병 실현을 통한 왕조 국가 재건을 목표로 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실학(實學)'은 없었다."

한평생 한국 경제사를 연구해온 안병직(81)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정약용(1762~1836)의 개혁론을 담은 대표 저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경제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경인문화사)를 펴냈다.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완성자로 꼽히는 정약용이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1817년 저술한 '경세유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와 함께 '1표 2서'라고 하는 그의 정치 경제 사상을 담은 주저(主著)이다. '2서'가 당시 국가 체제를 토대로 효율적 운영 방법을 담은 데 비해 '1표'는 국가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고 있어 그의 개혁론이 집약된 것으로 평가된다.

안병직 교수는“고려 말 이후 확고하게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로 자리 잡아 한국경제사의 DNA 역할을 했던 결부제를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안병직 교수는 한국 경제사 연구에 본격 착수한 1970년대에 동년배 국사학자들과 함께 실학과 조선 후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정약용 연구에 뜻을 모았고 한문학자들이 가세해서 '다산연구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경세유표' 번역을 시도했지만 미완성 저술이고 내용 파악이 어려워 '목민심서' 번역으로 선회했다.

안 교수는 경세유표에 매달려 그 체계를 잡는 데 집중했다. 그는 경세유표의 뼈대를 국정 과제를 담은 '체국경야(體國經野·도성을 건설하고 들을 구획함)'와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정부 조직 개편안을 제시한 '설관분직(設官分職·관직을 설치하고 나눔)'으로 정리했다. 안 교수는 "정약용은 중국 주나라 때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를 모델로 조선왕조 국가를 개혁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어 경세유표의 내용을 조선 후기 경제사와 연결해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정약용이 국가 개혁의 핵심 과제로 제시한 정전제(井田制)를 조선왕조의 토지 제도였던 결부제(結負制)와 관련시키며 파고들었다. 결부제는 토지를 절대 면적이 아니라 곡식 수확량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그는 "결부제로는 정확한 토지 실태 파악이 불가능하고 세금 징수도 주먹구구식이 되며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鄕吏)의 농간을 방지하기 어렵다"며 "다산은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해결책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세종 때 이런 문제점을 바로잡으려는 논의가 한 차례 있었지만 근본적 개혁에는 실패했다. 안 교수는 "전문가들의 숙의(熟議)에 맡겨야 할 것을 백성들 공론에 따르자고 넘기는 바람에 초래된 결과"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토지 면적을 정확히 계산하여 9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정전제를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먼저 토지 실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시급하다고 보고 지형에 따라 구획된 지적도인 '어린도(魚鱗圖)' 작성을 역설했다. 또 산림·광산·수산 등의 산업 개발을 통해 전 국민이 세금을 바치는 부공제(賦貢制)의 실시를 주장했고, 분업과 통상을 중시하는 통공역사(通功易事)를 강조했다. 국가의 경제 기반을 다양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다산은 자신의 개혁론이 당장 실현될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다. 그는 몇 군현에서 정전제를 시험 실시한 뒤 점차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경세유표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고 대한제국 시기 토지 조사 때도 활용되는 등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안병직 교수는 실학의 근대성 주장에는 선을 그었다. 안 교수는 "국가의 절대적 토지 장악을 전제로 한 정전제는 왕정(王政)으로서는 최선이지만 사적 토지 소유권 확대와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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