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체험한 '멍 때리기 대회'.. 멍을 허하라

이종윤 입력 2017. 10. 1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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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안 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퍼포먼스/멍 때리기가 오히려 성과 내는데 도움돼

‘학자금 대출이 얼마 남았더라’ ‘주말 데이트는 어디로 가야하지?’ ‘앞으로 뭐 해먹고 사나’

1분1초를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늘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에 불안과 초조함을 느낀다.

부지런함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사회는 어제와 오늘, 내일의 계획을 착실히 세워 행동하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던져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기’를 잘 하는 사람을 최고로 꼽는 이들이 있다.

지난 14일 서울 강동구 암사선사유적지에서 ‘2017 강동 멍 때리기 대회’가 개최됐다.


지난 14일 서울 강동구 암사선사유적지에서 ‘2017 강동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올해 4년차를 맞는 이 대회는 도심 한복판에서 바쁜 사람들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조시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퍼포먼스다.  

지난해 가수 크러쉬가 공중파 예능을 통해 멍 때리기 대회에 출전, 의외의 우승을 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지난 여름 인기리 방영된 tvN ‘알쓸신잡’의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 사는 우리들은 뇌가 점점 지쳐간다. 뇌도 휴식이 필요하다”라며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멍 때리기처럼 뇌가 제대로 쉬어야 일의 성과도 좋아질 수 있다”고 멍 때리기의 효용을 설명했다.

평소 잡생각과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기자가 멍 때리기 대회에 직접 참가했다.

이번 열린 멍 때리기 대회는 80명의 출전자를 모집하는데 500여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참가 이유를 적은 문구들.


치열한 추첨경쟁을 뚫은 참가자들은 대회 당일 기대와 설렘이 어린 표정을 지닌 채 대회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등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20~30대 직장인, 중년층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해 모두가 멍 때리기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멍 때리는 참가자들.
멍 때리기에 열중한 참가자들.


은행원 이은지 씨(27)는 “은행 업무를 보는데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정신 없이 바쁘다”며 “매일 많은 업무량에 시달리는 나의 몸과 뇌를 좀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참가하게 됐다”고 전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이수지 씨(21)는 “삼수생이라는 현재 위치와 시험을 앞둔 요즘 스트레스가 부쩍 많다”며 “멍 때리는 것이 오히려 집중에 좋다고 들었다. 이 시간 이후로 집중을 좀 더 잘해보고자 참가했다”고 덧붙였다.

멍 때리기에 심취한 참가자.


기자도 ‘멍 때리기 대회’인만큼 ‘멍이 든 복서’가 멍을 때린다는 다소 엉뚱한 콘셉트로 대회를 함께했다.

쪽빛 가을 하늘과 청명한 공기가 어린 잔디밭은 진정 멍 때리기에 부족함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멍을 때리는가 싶었지만 이윽고 방해꾼들이 나타났다.

‘사그작 사그작’ ‘윙윙윙’ 가을볕이 내리는 잔디 위로 벌레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움직임이기 시작했다. 기자가 입은 반바지를 터널 마냥 지나가던 12마리의 개미와 땀방울 어린 콧잔등을 쏠듯 말듯 위협한 3마리의 벌, 다리를 넘어 은밀한(?) 곳을 파고든 거미인지 귀뚜라미인지 모를 벌레까지 훼방꾼들이 득세하여 조기탈락이라는 곤욕을 치를 뻔했다. 

대회규정 상 가벼운 자세 변경은 허용되지만 큰 움직임은 바로 탈락이기에 기자는 근육 경련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는 다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선사인과 3분 교대 찬스를 쓴 참가자.


대회봉사자들이 안마 서비스, 식수, 부채질, 선사인을 제공하고 교대 후 3분 휴식이라는 찬스카드가 있어 탈락 위기의 참가자를 구제할 수 있었다.

총 90분간 진행된 대회는 절반의 참가자들이 멍 때리기를 완수해 대회 사상 최대 인원이 참여한 멍 때리기 기록을 남겼다. 가장 안정된 심박수를 보이는 참가자와 시민들의 즉석 인기투표를 합쳐 높은 점수를 받은 참가자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자는 아쉽게도 날벌레와 근육 경련을 참느라 롤러코스터와 같은 심박수 변화로 인해 수상자에 선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시간이 자유와 휴식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성과, 조직의 성과에 쫓겨 우리는 오늘도 아등바등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높디 높은 하늘과 온몸을 한바퀴 감싸는 가을바람을 느껴보자. 괜찮다. 잠시 멍을 때려보자.


이종윤 기자 yaguba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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