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日帝 총독부·안기부의 터.. '歷史의 교훈' 지워선 안돼

기자 2017. 10. 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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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애니메이션센터 전경. 구 서울방송국(오른쪽)과 원자력원(왼쪽)도 보인다. 안창모 제공
남산 총독부 전경. 안창모 소장 엽서
애니메이션센터 설계공모 당선안.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제공

■ 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⑧ 남산 새 애니메이션센터 설계안 ‘유감’

퇴계로에서 남산으로 오르기 위해, 시적 낭만이 물씬 풍기는 이름의 소파로를 걷다 보면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울긋불긋한 색채의 건물군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색채 감각으로는 매우 낯선 풍경이다. 가까이서 확인해 보면 ‘CARTOON MUSEUM’이라는 영어 간판이 보이고 울긋불긋한 색채와 피규어를 통해 건물의 용도가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건물들의 공식 명칭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다.

건물들은 오르막길에 면한 경사 길을 따라 지어진 까닭에 아래쪽에 석축을 쌓아 경사진 남산자락을 평평하게 만든 후에 지어졌다. 건물들이 현대적인 데 반해 석축은 꽤 오래된 듯해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애니메이션센터를 짓기 위해 만들었던 석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석축은 현대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애니메이션센터를 받치고 있는 석축은 우리의 근대사를 짓밟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만들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시작된 통감정치의 심장부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첫 단계였던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를 짓기 위해 일제는 남산의 북측 산록을 깎고 석축을 쌓아 대지를 만들었다. 통감부 청사가 지어진 것은 1906년이었다. 통감부는 5년 후인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직후에 총독부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후 1926년 경복궁 터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식민지배의 심장부가 남산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남산 총독부는 용도가 달라졌다.

바뀐 새 건물의 용도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관이었다. 정식 이름은 ‘은사기념과학관’이었다. 은사(恩賜)의 사전적 의미는 ‘왕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주는 일 또는 그 물건’이다. 여기서 왕은 일왕을 의미한다. 따라서 은사기념과학관은 ‘일본 왕이 조선의 식민지민들에게 은혜를 베푼’ 행위를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은사’ 관련 시설 중에서도 어린이를 위한 시설은 제국주의의 힘을 중화시키는 성격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독재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커버하기 위해 자애로운 이미지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어린이들이 동원된다. 일제의 이러한 의지는 ‘초등학교·중등학교에 적극 보급하는 과학교육이 미국과 영국을 싸워 이기는 지혜의 필중탄(必中彈)’이 돼 대동아 건설의 완수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것이었다. ‘은사’라는 단어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가 이용했던 또 다른 단어는 ‘자혜(慈惠)’였다. 이 단어는 주로 병원에 사용되었다. ‘자혜의원’이다. 각 도의 도립병원 이름은 예외 없이 ‘○○도립자혜의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를 지배했던 서구의 유럽제국들은 식민지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건축양식으로 총독부를 짓는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던 일본은 자신들의 건축양식으로는 한국에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서양제국과 같은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서양건축 양식으로 남산에 통감부(후에 총독부)를 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습은 서양건축 양식이었지만 재료와 구조는 나무였다. 서양건축처럼 조적조(組積造·돌과 벽돌,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벽을 만드는 건축 구조)나 석조로 짓지 못한 것이다. 이는 힘은 가졌지만 서양건축을 충분히 구현할 만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무로 지어진 첫 건물은 1926년에 총독부가 경복궁 내 신청사로 이사 간 후 은사기념과학관으로 바뀌었지만 6·25전쟁 중 화재로 소실됐다. 그리고 6·25전쟁 후 빈터로 남겨진 구 남산총독부 터가 여러 용도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방송국 설립이었다. 해방 후 만들어진 첫 방송국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정동에 첫 라디오 경성방송국이 지어졌지만 해방 후 우리 손으로 지은 방송국은 남산에 세워진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원자력이 새로운 과학시대의 총아로 등장하던 시절에는 원자력연구원도 만들어졌다. 실험용 원자로는 공릉동에 세워졌지만 원자력연구를 총괄하는 원자력원(1961)이 남산에 세워진 것이다.

과학관도 다시 만들어졌지만 그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다. 1928년 신문기사에는 직원 1명과 사환 1명 단 두 명을 지닌 건평 60평 규모의 초라한 대한민국국립과학관이 소개돼 있다. 전쟁 중에 소실된 과학관이 재건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결과는 바람과는 달랐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구총독부 터와 주변은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1926년에 총독부가 경복궁 내 신청사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한반도 지배의 심장부로서 주변에는 총독관저와 일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경성신사 그리고 일본 절 동본원사가 위치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전쟁을 거치며 경성신사 터에는 숭의여자대학이 들어섰고, 러일전쟁의 주역으로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물꼬를 튼 일본군 장성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위한 노기신사터에는 군경유자녀를 위한 보육시설과 리라초등학교가 들어섰다. 그리고 길 건너의 동본원사 터에는 또 최초의 TV방송국도 지어졌다.

1957년 건축가 김태식의 설계로 건축된 서울방송국은 9개의 스튜디오와 3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개방송실로 구성됐다. 3층 800평 규모로 지어진 서울방송국은 3층의 일부가 철거됐지만 신축 당시의 모습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1961년에 지어진 원자력원은 최초의 커튼월(Curtain Wall·벽체가 단순히 공간을 칸막이하는 커튼 구실만 하는 건축물) 병원인 구(舊) 명동성모병원을 설계한 김정수의 작품으로 규모는 작지만 동시대 세계건축의 흐름을 담은 모더니즘 건축의 백미다. 두 건물 모두 외장의 색은 현란하게 바뀌었지만, 신축 당시의 모습이 제대로 보존돼 있다.

방송국은 1977년 1월까지 사용됐다. 1976년 11월 한국방송공사(KBS)가 여의도로 이사 간 후 이곳은 국토통일원 청사로 변했다. 통일원 청사로 개청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통일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새로 통일원 청사로 용도가 바뀐 구 방송국의 벽면에 ‘국토통일(國土統一)’이라는 휘호를 새겼다. 이날 박 대통령은 5·16쿠데타 당시 첫 방송을 했던 전 KBS방송국 제7스튜디오를 둘러보았는데, 통일원은 이 스튜디오를 당시 모습 그대로 유지했다고 한다.

통일원은 1986년 상공부가 과천으로 이전함에 따라 상공부가 위치했던 현 정부서울청사로 옮겼다. 그리고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는 통일원이 사용했던 구 서울방송국 건물을 마저 사용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을 바꾼 후 1986년 통일원이 사용하던 구 서울방송국까지 사용하게 됨에 따라, 규모를 확대한 안기부는 1995년 내곡동 청사로 옮기기 전까지 남산의 실질적인 주인 행세를 했다.

남산의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사 간 후 구 서울방송국 건물의 주인은 서울시로 바뀌었다가 1999년 5월 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섰다. 1906년 통감부가 이 땅을 차지한 지 90여 년 만에 역사적 무게를 덜어낸 용도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통감부 청사에서 총독부 청사, 해방 후 서울방송국과 통일원 청사 그리고 안기부 청사로 이어진 이 터의 역사는 역사의 무게를 덜어낸다고 덜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내곡동으로 이사한 안기부는 자신들이 사용했던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철거를 요구한 배경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서울시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설의 일부는 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으며, 중앙정보부 핵심시설의 일부는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담는 시설로 남는다고 한다. 이는 역사의 교훈을 안고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서울시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기부의 철거 요청과 서울시의 흔적 남기기는 흔적을 지우면 역사의 교훈 역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두 기관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시는 남산 중앙정보부의 핵심 시설 이상으로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안고 있는 조선총독부 터와 해방 후 한국현대사의 현장으로 통일원과 안기부 청사로도 사용되었던 서울방송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기존 애니메이션센터의 창작·마케팅 지원과 전시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새 애니메이션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이미 설계공모를 통해서 당선안도 선정됐다. 시는 설계공모를 통해 지어질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남산 예장자락 일대의 역사를 상징하는 풍부한 공간을 창출하는 동시에 주변 전체를 상상과 생동의 장소로 탈바꿈시키는 건축적 사건’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야기하는 예장자락의 역사는 중앙정보부의 역사지 남산총독부의 역사는 아니다. 새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국치의 장소에 지어질 예정이지만, 설계공모전 과정 어느 곳에서도 주최 측과 설계자가 땅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당선안대로 지어진다면 건축가 승효상이 주장하는, 터가 갖고 있는 무늬가 사라지면서 역사의 교훈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 우려된다. 여기에 더해 남산 중앙정보부 터를 ‘인권센터’로 만들겠다는 뜻을 세운 서울시 의지의 진정성도 의심받을지 모른다.

이대로 애니메이션센터 사업이 진행된다면 역사의 현장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중앙정보부 터가 갖는 역사의 교훈과 조선총독부 터가 갖는 역사적 교훈의 크기를 견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남산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온전하게 지켜야 할 물리적 장소일 뿐 아니라, 동시에 지난 600년 넘게 우리가 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문화일보 9월 13일자 28면 7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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