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②선통제보다 기구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황제, 순종

윤신원 입력 2017. 10. 1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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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푸이(선통제)', 우리나라의 '순종', 이들은 모두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마지막 황제들이다.

푸이와 순종은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였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다음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퇴위한 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하고 4년 후인 1937년 7월, 베이징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관동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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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순종황제즉위식 (사진=아시아경제DB)


[아시아경제 윤신원 기자] 중국의 ‘푸이(선통제)’, 우리나라의 ‘순종’, 이들은 모두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마지막 황제들이다. 역사적으로 마지막 황제들은 기구한 삶을 살곤 한다. 푸이와 순종은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였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푸이의 연호는 두 개다. 청나라 때의 ‘선통제’와 만주국에서의 ‘강덕제’.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다음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퇴위한 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 지위가 막강해 푸이는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에 가까웠다.

특히 즉위식에서는 만주국의 전통을 무시한 채 일본 관동군에 의해 치러졌다. 만주국의 슬로건인 ‘오족협화’를 내거는데 있어 민족주의 색채라며 관동군이 반대하자 푸이는 만주군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또 관동군 장교인 요시오카 야스나오나 쿠도 타다시가 항상 푸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푸이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말하고 움직였다. 관동군은 푸이 동생 푸제도 일본 천황가의 친척과 혼인을 시키기까지 했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하고 4년 후인 1937년 7월, 베이징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관동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1945년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국 국경선을 돌파했고 일본군들은 반격도 하지 못하고 패주한다. 같은해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3일 후 푸이는 퇴위하게 된다.

순종은 어떨까. 순종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1875년 세자에 책봉됐고 1897에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황태자에 책봉됐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명성황후가 시해당했고 1907년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을 책임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대외적으로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본은 순종의 즉위식을 꾸며내기도 한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모두 대리인을 등장시켜 거짓으로 황위 계승식을 거행했다.

순종황제는 불과 4년만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순종은 일본 황실에 종속됐고 이왕으로 격하됐다. 나라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던 순종황제는 아버지 고종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고종의 사망이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도 항간에 퍼졌다. 그리고 순종은 1926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라를 잃은 채로 생을 마감했다.

윤신원 기자 i_dentit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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