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요양·복지사들 "방문 열기 무서워요"

성유진 기자 2017. 10. 1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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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부 아닌데 온갖 잡일.. 욕설·성희롱 시달리기도]
요양보호사, 노인 도우려는데.. 김장 등 집안일까지 떠맡겨
복지사, 힘든 사람 챙기려는데.. "연락처 달라" 팔·다리 더듬어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 등 사회복지 서비스 종사자들은 최근 대상자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 잦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며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방문 요양보호사' 등 방문형 서비스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을 방문했다가 개인 심부름을 요구받거나 성희롱·욕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도 넘은 요구에 성희롱, 욕설까지

경기도에서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이모(여·54)씨는 지난 추석을 앞두고 80대 남성 환자의 집을 방문했다. 환자의 아내는 이씨에게 "아들 부부와 손주들이 오기로 했으니 명절 음식을 장만해 달라"고 했다. 단칼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전·갈비찜 등 추석 음식을 3시간 내내 만들어야 했다. 이씨는 "어르신들에게 좋은 일 한다는 생각에 이전에도 집안일을 거들어 드렸는데, 갈수록 요구가 지나치다"고 했다.

/김성규 기자

요양보호사는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에게 신체·가사 활동을 지원한다. 업무는 대소변 받기, 서비스 이용자가 먹을 음식 준비하기 등 환자 관련 일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보호자가 다른 식구 몫의 집안일까지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요양보호사(여·55)는 "한 할머니는 매주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열며 음식 장만을 요구했다"며 "손자에게 보낼 김치를 담가 달라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농사를 지어 달라거나 텃밭을 가꿔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요양보호사들 사이에선 "우리는 국가 공인 파출부"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쪽방촌 상담소 등 복지 현장에서 뛰는 사회복지사들도 폭행·성희롱 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성북구의 사회복지사 이모(여·30)씨는 몇 달 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그가 담당하는 50대 남성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지금 죽고 싶다. 빨리 와 달라"고 했다.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이 남성은 멀쩡했다. 오히려 이씨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하며 팔과 다리를 더듬었다. 이씨는 "뿌리치고 뛰쳐나왔지만,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했다. 대구의 사회복지사 손모(27)씨는 "인사만 해도 '뭘 쳐다봐 XX야' 등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 보호막 없어

요양보호사나 사회복지사가 이런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는 것은 '사회복지 종사자는 무슨 요구든지 들어줘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복지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생·헌신해야 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이 강하다는 것이다. 오승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은 "혹여 문제 제기를 했다가 가뜩이나 처지가 어려운 서비스 이용자에게 해가 갈까 봐 사회복지사 스스로 신고를 꺼리기도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유독 사회복지사에게는 허드렛일을 시키고 욕설을 하며 모욕을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방문 요양보호사 제도도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집안일 해주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시선이 강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이를 신고할 곳이 마땅찮다. 방문 요양보호사는 보통 민간 요양센터에 고용돼 일한다. 현재 민간 요양센터는 전국 1만2000개에 달한다. 민간 센터들이 환자 유치 경쟁을 벌이며 요양보호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먼저 "집안일을 해주겠다"며 홍보까지 한다. 요양보호사도 환자가 줄면 수입이 감소한다. 이경규 한국요양보호협회 상임이사는 "환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언제든 요양보호사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 보니, 요양보호사 입장에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며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심사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이용자의 부당한 요구를 제재하는 등 보호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전국 사회복지 시설 역시 95% 정도가 직영이 아닌 민간 위탁이나 민간 운영 방식이다. 임은경 한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 사무처장은 "해당 기관 이미지가 손상될까 봐 대놓고 이용자에게 항의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2인 1조 방문 의무화, 상담실 내 안전 강화 등 폭력 피해에 대한 안전 매뉴얼 확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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