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환상은 바다보다 싱싱하다"
옛 걸작과 잡동사니 대비해 시간의 영원성 드러낸 新作展
봄비 내리던 날, 동화작가 정채봉과 화가 한만영이 명륜동 소줏집에 마주 앉았다. 상 위에 오른 소주병을 가리키며 정채봉이 물었다. "여기에 든 게 무어게?" "갑자기 무슨 소리?" "바보같이, 자기가 그려 넣어 놓고도 모른대." 정채봉은 한만영의 그림 '병'을 떠올리고 한 소리였다. 화가가 술 대신 병 속에 그려 넣었던 흰 구름과 파도, 그리고 바다. 정채봉이 술잔을 채우며 외쳤다. "자, 흰 구름 한 잔 받아라." 한만영이 지지 않고 맞받았다. "자, 파도 한 잔 받아라."
작가 정채봉이 "그대의 환상은 바다보다 싱싱하다"고 예찬했던 화가 한만영(71·성신여대 명예교수)의 신작전(新作展)이 11월 5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린다. 술병 속에 바다를 담는 동화(童話) 같은 상상력으로 40년 화업을 일궈온 한만영 특유의 작품 16점을 120호 이상 대작(大作)으로 만난다.
1980년대부터 지속해온 '시간의 복제(Reproduction of Time)' 시리즈의 완결편 같은 전시. 홍익대 회화과를 나온 한만영은 당시 유행한 미니멀아트 대신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실험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유물부터 르네상스와 18~19세기 명화를 비롯해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 불상, 조선 시대 진경산수에 이르는 옛 걸작들을 화폭에 옮겨온 뒤 오늘의 잡동사니들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시간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칠순에도 어린아이 같은 창의의 날개는 녹슬지 않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걸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실제 이젤에 올려놓고 작업하는 듯 형상화한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림 앞에 이젤의 턱이 나와 있고 그 위에 기다란 붓이 놓인, 회화와 조각을 결합한 작품이다. 한만영은 "그림 그리던 화가가 잠시 외출한 사이"라며 웃었다. 관람객은 원작이 그려진 17세기 네덜란드와 붓이 놓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착각에 잠시 기묘해진다.
앵그르의 초상화 '마드무아젤 리비에르'도 재미있다. 여인의 흰 드레스에 찍힌 문양의 정체는 알고 보니 휴대폰 부품들. 제목이 'K뷰티'다. 미(美)의 상징이었던 르네상스 시대 여인들과 한국화장품 혹은 휴대폰에 열광하는 서구의 젊은 여성들을 중첩해 풍자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엔 조선 시대 청화백자가 '과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처음 등장했다. 작가는 18~19세기 청화백자 중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선별해 MDF 합판으로 도자기 형상의 부조를 만든 뒤 청화백자 문양을 그려 넣었다. "청화백자의 하늘색이 좋아서! 모든 게 변하지만 18세기나 오늘의 하늘은 변하지 않고 늘 푸르러서요." 고대 신전(神殿)을 극사실로 그린 작품에 거울을 붙인 데도 이유가 있다. "거울에 비친 현재의 내 모습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습니다."
동양과 서양, 회화와 조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한만영의 실험은 갓난아기 적 어머니를 여읜 아픔과 잇닿아 있다. "너무 일찍 사별한 바람에 주변인들 말을 통해서만 어머니를 상상했어요. 그러나 얼굴, 성품, 체온 등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죠. 타인들에 의해 조립된 한낱 개념적인 형상일 뿐." 인습과 관념에 도전하며 고독하게 쌓아 올린 한만영 예술의 진면목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 난해하다 싶으면 "생과 사, 파괴와 창조, 아름다움과 추함은 하나여서 이른바 '걸작'이란 것과 일상의 허접한 물건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시길. 푸른색 넘실대는 한 편의 환상 동화를 읽은 느낌이다. (02)7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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