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기본소득 실험]한국은 '복지 인프라' 먼저 다져야"
[경향신문] ㆍ조세재정연구원 최한수 부연구위원 직접 가보니
전 세계에서 ‘기본소득’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2019년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가 되면 그동안 속시원히 풀지 못했던 의문, 이를테면 ‘국가가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면 사람들은 게을러질까, 아니면 더 창의적인 일을 하러 나설까’ 같은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도 있어서다.
핀란드가 올해 1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시작한 기본소득 실험이 2018년 12월에 끝난다. 세계 여러 곳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정부가 직접 실험에 나선 곳은 핀란드뿐이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25~58세 실업수당 수급자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2년 동안 매달 560유로(약 74만5000원)를 주는 것이 골자다. 이번 실험을 주관하고 있는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이 직접 밝힌 실험 목적은 ‘기존 복지 제도를 간결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노동시장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 극도의 통제 속에 진행되는 실험
기본소득의 한국 적용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최한수 부연구위원(사진)은 지난달 17일부터 23일까지 핀란드를 다녀왔다. 국가 차원에서 실험하고 있는 핀란드의 정부부처·학계 인사들을 만나 구체적인 준비 상황과 진행 정도를 들었다.
최 부연구위원에 따르면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철저한 준비와 통제 속에 진행되고 있다. 2년간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의 명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사회보험청조차 그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의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핀란드 당국은 2015년 10월부터 실험을 준비했다. 2016년 3월에 기본소득을 설계하기 위한 보고서가 나왔고 같은 해 12월 의회가 실험에 필요한 예산을 책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상은 성인 실업자 중에서 무작위로 뽑았다. 선정된 2000명은 2년간 실업수당 대신에 기본소득을 받는다. 이들에게는 실업수당과 기본소득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 대신 실험 기간 중 취업해도 기본소득은 계속 받는다. 실업수당은 취업하면 지급이 중단된다.
월 560유로는 실업수당 실수령액과 똑같이 맞춘 금액이다. 핀란드에서 실업수당은 월 700유로지만 세금 20%를 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이 이 액수다. 실업수당 대신에 같은 액수를 기본급처럼 계속 줄 경우 구직활동에 나설 유인이 사라지는지, 혹은 적극적인 구직 노력을 할 것인지를 보기 위해 이렇게 정했다. 대상자의 연령을 25~58세로 제한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핀란드에서 25세 이하는 월 100유로의 아동수당이나 월 300유로의 학생수당을 받는다. 58세 이상은 연금을 수령한다. 반면 그 사이의 연령층에선 일자리를 잃었을 때에 받는 실업수당 외에는 현금으로 지급받는 복지급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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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 일원화해 ‘함정’을 줄인다
최 부연구위원은 “핀란드 연구팀은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조건 없는 현금 급여’로 바꿈으로써 이른바 ‘복지함정(welfaretrap)’의 문제를 없애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복지함정은 사회보장비를 지급받는 이들이 노동을 포기하면서 정부 재정에 구멍이 뚫리고 경제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현상을 가리킨다. 복지함정의 가장 큰 문제로 전문가들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지목한다. 아프지 않은데 질병수당을 받는 식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이런 조건 없이 똑같이 주는 편이 해이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있다. 조건을 달아서 주는 급여를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함으로써 복지 관련 운영예산을 줄이고, 이들이 노동시장에 적극 참여할 것인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핀란드 기본소득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무작위 통제실험’이라는 형식이다. 서울시나 성남시의 청년수당과 본질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실험이 끝난 뒤에 기본소득이 노동의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핀란드 사회보험청은 실험 기간 동안 대상자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대상자가 일자리를 찾는지는 근로소득세가 발생했는지를 통해 체크할 뿐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이후 교육비나 의료비 씀씀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실험이 끝난 뒤 자세한 데이터를 만들어 활용할 계획이다. 실험의 목표에는 단순히 대상자가 일자리로 되돌아가는지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는 2019년에 나온다. 그 전에는 아무런 결과물도 내놓을 수 없지만 세계의 관심은 뜨겁다. 올해에만 각국 연구기관과 언론의 인터뷰 300여건이 몰렸다고 한다.
■ 기본 복지 다지고, ‘증세’ 논의를
지난해 6월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안을 놓고 국민투표가 실시되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한국에서도 학술회의를 비롯해 기본소득 의미와 가능성을 짚어보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성남시장 등 대선주자들이 관련 공약을 내걸면서 국내에 도입될 가능성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한국에 적용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처럼 하려면 기존 사회보장제도를 먼저 정비해야 한다. 한국의 복지급여는 핀란드와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다. 핀란드에선 복지를 단순화해 관련 비용을 줄이는 것이 현안이지만 한국은 기초적인 복지 인프라가 확충돼가는 단계다. 기초생활보장을 위한 생계급여 등을 없애고 기본소득을 주는 방식이 유효한지 따져봐야 한다.
여기에 각종 소득공제 등을 없애 추가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재정이 모자라면 증세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 봤자 한국에서 줄 수 있는 기본소득은 월간 30만원가량이 한계라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또한 최 부연구위원은 “기본소득은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충분치 않은 액수의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아질 수 있다. 저소득층보다는 4~6분위 계층, 즉 중위소득 계층이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핀란드처럼 사회보장제도를 더 넓고 깊게 만든 뒤에 도입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며 “지자체 단위로 실험을 해볼 수 있겠지만, 기본소득을 왜 주는지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이후 성과를 명확히 알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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