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북한 김정은과 주한미군 바꾼다는데

김수정 2017. 10.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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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역전 외교 노장 '키신저 해법' 수면에
북한 비핵화 미·중이 공동 선언하고 추진
핵무장 없는 북한은 무너지게 돼 있어
한미동맹은 유지하되 미군 주둔은 억제

"중국도 북한 부담, 미군 철수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최대 위협이 중국인데 미국이 철수안 수용 안할 것"
"당대회 끝낸 시진핑 트럼프와 북핵 적극 나설수도"
"한반도 운명 걸린 담론 횡행, 우리가 선제적 대응해야 "

대한민국의 운명, 한반도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는 ‘북핵 해법’ 들이 워싱턴 조야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강조하는 군사적 옵션은 물론, ‘북한 핵 폐기는 불가능하므로 보유를 인정하자’ ‘평화협정을 맺고 주한미군은 철수’ ‘한반도를 일본과 중국 사이 중립지대로’ 등이다. 대개 중국을 상대로 한 타협안으로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30년간 북핵 문제로 씨름하는 동안 거론되지 않았던 담론들이 수면위로 튀어나오는 것에 대해 위성락 서울대 객원 교수는 “북한의 6차 핵실험 성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 단계 진입으로 미 본토 타격이 현실화하면서 극약 처방처럼 나오는 해법들”이라고 말했다.

10월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93세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왼쪽)을 초청, 외교 정책 자문을 구하기 앞서 기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책 당국자들과 학계가 주목하는 게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지난여름 밝힌 이른바 ‘키신저 솔루션’이다.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93세의 역전 외교 노장 키신저를 만나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공개하면서 관심은 더 커졌다. 키신저는 1969~77년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닉슨 시절엔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겸임)을 지내며 소련과의 데탕트, 미ㆍ중 수교 협상을 주도했다. 이후 100여차례 중국을 방문하며 ‘국빈’ 대접을 받아온 그는 미국이 중국의 부상하는 힘을 인정하고 대화·협력으로 새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키신저의 지론은 “세계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으니 평화와 인류의 진보를 위한 새 세계질서 창출에 공동 노력하는 차원에서 미·중관계를 풀어야 한다”(9월 27일 미·중 대학총장 포럼)는 것이고, 그 핵심 무대를 한반도로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지난 4월과 9월 미국을 찾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방문 때 마다 키신저를 만나고 돌아갔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2016년 12월 2일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는 모습. 중국은 미중 수교의 주역 키신저를 중국의 '국빈'급으로 대접한다. [로이터]
키신저는 리차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양대 외교 자문역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월 트럼프 행정부 인수위 관계자 등을 인용해 “키신저는 트럼프에게 마음만 먹으면 전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사 중 한 명으로, 특히 자신이 형성에 기여한 국제 파워 블록의 역학관계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며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회장을 국무장관으로 추천한 인물도 키신저라고 했다. 트럼프는 키신저 면담 사흘 뒤인 13일 이란과의 핵협정(2015년 7월 오바마행정부가 체결) 준수를 인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바마가 체결한 이란핵협정을 대놓고 비판해온 대표적인 인사가 키신저다.

키신저가 지난 8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How to Resolve North Korea Crisis’란 제목으로 기고한 해법의 핵심은 ‘미·중의 빅딜(대타협)’이다. ▲북한 핵을 동결이 아닌 짧은 시간내 완전하게 비핵화하는 것을 ▲미·중이 공동 목표로 천명하고 ▲북한의 비핵화로 초래될 (북한의)정치적 진화(political evolution, 문맥상 정권 붕괴로 해석) 이후 남북한 두 국가든, 통일 국가든 주한미군 주둔을 제한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뉴욕타임스(NYT)는 7월 말 키신저가 틸러슨 국무장관에게 “북한 정권 붕괴 이후 상황에 대해 미·중이 사전 합의하면 북핵 해결에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주한미군 철수를 카드로 제시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정책 조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
이 해법은 키신저 입장에서 보면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周恩来) 회담 이후 미·중이 유지해온 한반도의 ‘스테이터스 쿼’(Status Quo·현상유지)를 깨는 시도다. 양국 수교 45년 만에 미국의 자리를 위협하는 넘버 2국가로 부상한 중국이 미국을 태평양 동쪽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상황에서 ‘비정상국가’ 북한의 핵·미사일 본토 위협이란 변수를 반영해 구상해 낸 또다른 체스판인 셈이다.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왼쪽 두번째)과 저우언라이(오른쪽 두번째) 중국 수상의 정상회담 장면. 왼쪽 첫번째가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이다. 키신저는 1971년 7월 희말라야 산맥을 통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를 만나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키신저안이 현재 미국의 안보 지형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실화 되기 힘들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신원식 고려대 연구교수(전 합참작전본부장)는 “60·70년대 ‘닉슨 독트린’으로 가동된 키신저의 전략은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이 소련이었을 때 얘기”라며 “당시엔 베트남과 대만을 ‘손절매’하고 중국과의 수교를 활용했지만 현재 미국의 최대 위협이 중국이란 점에서 행정부가 키신저안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할 최대 전략 기지가 주한미군인데 중국을 압박할 카드로도 활용가능한 ‘북핵’해결을 위해 주한미군철수 또는 감축이란 ‘당근’을 중국에 줄 수 없다는 얘기다.
신원식 전 합참차장은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국의 우려를 감안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도 있다는 키신저의 해법을 미 행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트럼프가 키신저를 만난 것은 내달 초 중국 방문을 앞두고 시진핑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립외교원 김한권 교수는 “트럼프·키신저 회동은 중국을 인정하면서 북한 문제 해결을 시도하겠다는 상징적 제스처로 보인다”며 “미·중의 리더들이 ‘북한 붕괴로 이어질 비핵화와 주한미군 철수’를 한반도 새 질서 구축의 한 방안으로 테이블에 올릴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취임 후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이란 핵합의 인증을 거부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 온 트럼프는 기존의 익숙하지만 작동하지 않은 해법 보다는 지역내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과감한 판짜기를 시도할 수도 있어 보인다.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의 목표가 북한 비핵화에 있고 이를 (어떤 식으로든)달성한다면, 비핵화한 김정은 체제는 존립이 흔들리는 ‘정치적 진화’를 겪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핵프로그램 개발에 국가의 총역량을 쏟아부은 북한의 핵이 무용화되면 내부 정치적 소요, 나아가 정권 교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중국 역시 80년대 이후 남북간 체제 경쟁이 끝났는데, 북한이 그 힘의 균형을 ‘핵 무력’으로 유지한 상황에서 ‘비핵화된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트럼프가 키신저를 만난 것은 11월 초 정상회담에 앞서 시진핑에게 보내는 메시지로도 읽힌다"고 말했다.
1950년 6·15전쟁때 마오쩌둥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을 언급하며 참전했고, 이후 같은 논리로 핵을 가진 북한 체제도 엄호해온 중국이 키신저 해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위성락 교수는 “국제 사회에서 중국이 북한 때문에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해법이라면 고민해 볼 여지는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김한권 교수는 “중국의 북한 김정은에 대한 불만과 불신, 분노는 크지만 북한이 비핵화하고 친중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결국엔 한국 중심의 통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한다”며 “이런 우려를 고려한 주한미군철수 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키신저의 해법을 "전형적인 강대국 논리"라고 비판했다. 김성룡 기자
키신저 해법의 현실화 여부는 미지수이지만, 키신저의 시각 자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김성한 고대 교수는 “미·중간 공감대가 북핵문제 해결의 관건이라고 강조한 점은 평가할 만 하지만 김정은 정권 붕괴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식의 제안은 전형적인 강대국 논리이고 제국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했다. 위성락 교수는 “키신저는 자국 이익 중심으로 체스 두듯 외교를 해온 냉철한 현실주의자”라며 “꼭 키신저 안이 아니더라도 향후 미·중간 대타협에 한반도 통일 배제 등 우리 이익을 희생시킬 가능성도 있어 면밀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키신저가 세운 ‘위업’ 이면엔 종속 변수로 처리된 작은 나라들의 슬픈 운명이 있었다. 미·중 수교시 대만에 대한 처리는 물론, 베트남 해법도 그랬다. 키신저는 1973년 1월 베트남에서의 전쟁 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 체결로 북베트남의 레 둑 토 총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2년 뒤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북베트남의 총공세로 점령됐다. 북베트남이 공격할 경우 미군 전력을 전폭지원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미국을 원망할 남베트남은 사라졌고,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약속’은 없음을 증명한 한 사례로 남았을 뿐이다.

1975년 5월 패망한 남베트남 피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실은 815함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당시 중앙일보 특종 사진이었다.
키신저는 주한미군의 전개 억제를 얘기하면서 “현재의 동맹관계를 변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부연했다. 김한권 교수는 “키신저는 중국의 영향력 저지 차원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어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의미있는 수준으로 감축하더라도 한미동맹은 유지하자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성락 교수는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 방안은 우리의 안보에 있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우리 정부가 치밀하게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핵미사일 체계를 완전하게 갖추기 전 미국은 대 중국 압력 강도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18일 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자신의 2기(5년) 절대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미국과 북핵 문제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수정 외교안보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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