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 BIZ] 독일의 자존심 'SAP' 소프트웨어 대신 빅데이터를 입다
"기업들은 현재 갖고 있는 데이터 중 0.5% 정도만 제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얼마나 빠르게 100%까지 끌어올리느냐에 기업들의 생존이 달려 있습니다."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세계 최대의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독일 SAP가 미국 뉴욕에서 빅데이터(big data) 분석 기술인 '빅데이터 허브(big data hub)'를 공개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빌 맥더멋 최고경영자(CEO)는 1시간가량의 간담회 내내 '데이터'와 '인공지능(AI)'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SAP의 주력 서비스인 ERP(기업 자원 관리), CRM(고객 관리) 등의 소프트웨어는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전세계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지배하는 SAP가 차기 주력 시장으로 '빅데이터 분석'을 지목한 것이다.
SAP는 독일 IT(정보기술) 산업뿐만 아니라 독일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이다. SAP의 시가 총액은 1165억유로(약 156조7000억원)로 지난 3년 사이 2배 가까이 뛰면서 독일 기업 중 최대 가치를 자랑한다.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인 폴크스바겐과 생활가전·전기 업체 지멘스처럼 독일을 대표하는 제조업 기업들을 앞지른 것이다. 맥더멋 CEO는 "향후 수년 안에 기업 가치를 2500억유로(336조1500억원)까지 키우겠다"고 말했다.
SAP는 미국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IT 업계에서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비(非)미국 기업으로 평가된다. SAP의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 점유율은 4위이고, 기업용 소프트웨어에 국한하면 1위이다. SAP의 소프트웨어를 쓰는 기업은 미국의 애플, 나이키와 한국 삼성전자 등 30만여 개에 이른다. 경제 전문지 포천이 꼽은 500대 기업 중 95%가 SAP의 소프트웨어를 쓴다. 이를 통해 작년 매출 220억유로(약 29조6000억원), 영업이익 66억유로(약 8조8800억원)로 영업이익률이 30%에 이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SAP는 유럽의 디지털 불황(recession)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고 분석했다.
◇M&A를 통해 발빠르게 사업 다각화한 SAP
SAP는 강력한 시장지배력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지난 2010년 취임한 맥더멋 CEO는 SAP의 주력 사업 분야를 바꾸고 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대신 빅데이터, 클라우드(가상 저장 공간),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을 활용한 데이터 경제를 선도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지난달 공개한 빅데이터 허브는 데이터 시대를 장악하겠다는 SAP의 야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기업, 산업과 관련한 내부 데이터부터 소셜 미디어, 인터넷 등에 떠도는 관련 데이터를 모두 모아 실시간으로 분석해준다.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사물인터넷 분야에서도 올해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 브라질 등 총 3곳에 '레오나르도 센터'를 설립했다. 레오나르도는 SAP의 사물인터넷 브랜드다. 이곳에서는 제조 공정부터 물류, 배송 등 제조업 공정 전반에서 생산되는 데이터를 종합해 관리·분석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실시간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해준다. SAP는 2022년까지 사물인터넷 분야에 22억달러(약 2조5000억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런 신기술을 뒷받침하는 클라우드 사업도 키우고 있다. SAP는 독일·미국·캐나다 등에 20여 곳 이상의 데이터 센터를 갖고 있다. 작년에 클라우드 분야에서만 30억유로의 매출을 기록해 1년 전보다 30% 이상 성장했다.
SAP가 이처럼 발빠른 변신을 할 수 있는 배경으로는 과감한 M&A(인수합병) 전략과 외부 기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가 꼽힌다. 최근 한국 기업들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개방형 혁신'을 SAP은 이미 구현하고 있다. SAP는 2011년 클라우드 기반 소프트웨어 업체인 석세스팩터스를 34억달러(약 3조8500억원)에 인수했고, 2014년에는 비용 분석 소프트웨어 업체인 콘커를 83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인수하는 등 매년 수십억달러 규모의 M&A를 단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확보한 외부 기술을 즉각적으로 수용하면서 SAP의 경쟁력으로 삼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시간 데이터 분석 기술인 '하나(HANA)'이다. 이 기술은 서울대 차상균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원천기술을 활용해 만들었다. 2011년 이후 SAP의 모든 제품에 '하나'가 탑재됐다.
◇데이터 잡는 기업이 세계경제 장악한다
SAP가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은 데이터 경제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딥러닝(심층학습) 같은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과 메모리 반도체의 용량 증대 등으로 인해 과거에는 버려졌던 수많은 데이터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기업들은 이미 데이터를 20세기의 석유처럼 가공하면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보고 있다. SAP 역시 이런 흐름을 선도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데이터의 증가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2020년까지 150억대 이상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디지털 기기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될 전망이다. 여기에 사물인터넷(IoT)과 자율주행차 같은 새로운 분야까지 개척되고 있는 만큼 데이터 생산량 증가 규모는 추정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다. 이 기기들이 쏟아내는 천문학적인 데이터를 먼저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분석하는 기술을 갖춘다면 산업의 구분 없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맥더멋 CEO는 "앞으로 2025년까지 최소 2조 5000억달러(약 2800조원) 이상의 새로운 시장이 데이터와 연관된 미래 기술 분야에서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터 경제는 이미 미래가 아닌 현재이다. 세계 시가총액 상위 5대 기업은 애플,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으로 모두 방대한 고객을 확보하고 이들에게서 생산되는 빅데이터를 독점할 수 있는 기업들이다. 이들은 기업과 일반 대중의 데이터를 고스란히 쌓아두고 이를 활용해 사업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데이터가 금맥(金脈)일 뿐 아니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최근에는 SAP뿐만 아니라 세일즈포스, 오라클 등 기업용 소프트웨어에 주력했던 기업들도 앞다퉈 클라우드·빅데이터 기술을 앞세워 애플·구글 등과의 경쟁에 나서고 있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데이터 경제 시대는 여러 기업이 각자의 영역을 나눠 사업을 하고, 같은 사업 내에서도 여러 기업이 경쟁했던 과거와는 다르다"면서 "상위 몇 개 기업이 모든 산업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뒤처지는 기업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강력한 승자 독식 구도가 확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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