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취 감춘 '우골탑'과 '개천의 용'.. 그 자리엔 '금수저·흙수저' 타령만

오형주 입력 2017.10.13. 18:56 수정 2017.10.14.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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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창간 53주년
외환위기 20년 우린 달라졌나
(5) <끝> 계층상승 사다리 끊어진 한국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
불평등 심화·청년실업 만성화
전 세대 걸쳐 비관론 만연
"계층 상승 불가능하다" 1994년 5% → 2015년 62%
계층 대물림 인식 확산
"노력해도 내 아이는 금수저 못돼" 1999년 11% → 2015년 51%
저출산·고령화 '세계 최고'
출산율 1997년 1.52명 → 2016년 1.

[ 오형주 기자 ] 우골탑(牛骨塔).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모가 내다 판 소의 유골로 세워진 탑(대학)이라는 뜻이다. 과거 부모세대는 힘든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자식을 어떻게든 공부시켜 대학에만 보내면 삶이 나아질 거라 믿었다. 부모의 헌신으로 대학에 간 자식 중 상당수는 ‘개천의 용’이라 불리며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다. 자연히 경제와 사회 전반에도 활력이 넘쳤다. 1997년 말 닥쳐온 외환위기와 함께 이런 희망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사회 곳곳에 견고한 기득권이 자리 잡으면서 계층 이동 사다리는 빠르게 무너졌다. 우골탑과 개천의 용 신화는 자취를 감췄고, 그 빈자리에 ‘금수저와 흙수저’ 담론이 채워졌다. 한 번 실패해도 언제든지 도전 기회가 주어지는 ‘패자 부활전’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창업을 통해 자수성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사회가 역동성을 되찾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계층 상승 비관’ 21년간 12배↑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20년간 빠르게 활력을 잃어갔다. 통계청의 지난 20여 년간 사회의식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면 한국이 계층 상승의 통로가 막힌 ‘닫힌 사회’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외환위기 전인 1994년 통계청 조사에서 ‘자기 세대에서 경제·사회적 계층이 상승할 수 있다’고 답한 가구주는 응답자의 60%였다.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5%에 그쳤다. 하지만 20여 년 후 조사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왔다. 2015년 통계청의 같은 조사에서 계층 이동성을 낙관한 응답자는 21.8%에 그쳤다. 반면 62.2%가 비관적으로 답했다.

김진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국민 사이에 비관론이 확산한 것은 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충격을 정부가 제대로 막아주지 못했다는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말했다.

‘자식 계층 상승 못할 것’ 5배 늘어

세대 간 ‘대물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통계청의 1999년 조사에서는 가구주의 41.2%가 ‘자식 세대는 계층 상승에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비율은 16년 뒤인 2015년에는 30.7%로 감소했다. 대신 같은 기간 자식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본 응답자는 11.1%에서 50.5%로 다섯 배 가까이 급증했다.

청년층의 계층 이동성에 대한 좌절은 더욱 컸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19~29세 인구 중 절반 이상인 54.5%가 ‘계층이동 가능성이 낮다’고 답했다. 65세 이상 연령층의 응답 비율(38.9%)보다 16%포인트가량 높은 수치다.

정혁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젊은이들이 계층 이동성을 비관하는 이유는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낮은 신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사회적으로 공고화된 ‘이익집단 정치’의 틀이 청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산층 붕괴와 만성적 청년실업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대량 실업자가 양산되면서 중산층은 급속히 무너졌다. 1994년 자신을 ‘중간층’이라고 여긴 응답자는 60%에 달했으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54.9%로 하락한 뒤, 2015년 53%까지 떨어졌다. 대신 자신을 ‘최하층’에 속한다고 답한 비율은 1994년 12%에서 2015년 19.5%까지 상승했다.

외환위기가 남긴 또 하나의 상처는 ‘만성화된 청년실업’이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 4.6%에 그쳤던 15~29세 연령층 실업률은 1998년 12.2%로 최고점을 찍었다. 위기를 극복한 2000년대 들어서도 청년실업률은 크게 떨어지지 않고 8%대를 계속 맴돌았다. 지난해에는 9.8%까지 다시 상승했다.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면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소득분배 악화와 함께 중산층이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라며 “노인빈곤과 청년실업, 장년 고용 악화 등 여러 문제가 중첩되면서 대부분 계층이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느끼게 됐다”고 분석했다.

고령인구 증가속도 세계 최고

이런 상황에서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은 미래 세대의 복지 부담을 눈덩이처럼 불리면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한국 출산율은 외환위기를 전후해 극적으로 떨어졌다. 1997년 합계출산율은 1.5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9위 수준이었으나, 8년 뒤인 2005년 1.08로 사상 최저점까지 떨어지며 OECD에서도 꼴찌(35위)로 밀려났다. 지난해도 1.17을 기록,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고령 인구의 증가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1995년 5.9%에 불과했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2005년 9%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는 13.2%로 높아졌다. 반면 0~14세 유소년 인구 비중은 출산율 감소에 따라 같은 기간 23.4%에서 13.4%로 거의 반토막 났다.

최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출산율이 낮아진 것은 여성의 고학력화와 사회 진출 확대로 출산과 육아의 ‘시간당 기회비용’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라며 “저출산 대책도 장려금 등 단순한 ‘금전 지원’보다 직장보육시설의 획기적 확대 등 ‘여성의 시간’을 지원해주는 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공동 기획: FROM100· LG경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