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 도입하면 '집에서 쉬운 창업' 가능할까
[경향신문] ㆍ대통령 언급에 산업계 기대감
ㆍ기존 규제, 현판 재질까지 지정
벤처기업이 정부의 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하려면 부설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 이때 연구소의 독립공간이 없다면 칸막이로 다른 부서와 구분해야 한다. 연구소 현판은 칸막이에 부착해야 한다. 현판 재질도 아크릴, 목재, 철재 등이어야 하고, 종이 및 코팅 형태는 안된다. 주거용 건물에는 연구소를 설치할 수 없다. 모두 ‘기초연구진흥 및 기술개발지원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연구소 설립을 신고할 때 필요한 기준이다. 가정집 주차장에서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의 사례를 한국에서 찾기 어려운 데는 이런 규제의 탓도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계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 의사를 밝힌 ‘규제 샌드박스’가 창업과 신사업을 시도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시범사업 단계에서 모든 규제를 유예·완화한 후 문제가 생길 경우에만 규제를 적용하는 제도이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대 교수는 “모든 규제가 나쁜 건 아니다. 기존 규제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규제가 있다”면서 “그러나 불필요한 규제를 풀겠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정한 것’ 외에는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공무원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큰 데다 한 분야의 규제가 완화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로 충분히 규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신업계는 ICT를 에너지·금융과 연계하는 데 제약을 받고 있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에너지 중개거래 실증 사업자로 선정됐지만 입법이 지연되면서 관련 투자와 사업을 제때 하지 못하고 있다”며 “친환경 소규모 발전·거래·소비를 촉진할 제도적 토대가 될 중개거래 및 프로슈머 관련 법안의 연내 처리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업계는 역차별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 규제를 문제 삼기보다 규제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에 차별적으로 적용되면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기술과 산업 변화에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해 12월 의료분야 인공지능 및 빅데이터 관련 가이드라인 초안이 발표됐지만 최종안 발표가 지연되면서 이 분야 업계는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민단체는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할 때 개인정보나 소비자 보호 강화 조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시민단체 오픈넷의 박지환 변호사는 “공인인증서 이용 강제 규제나 카풀앱 규제 등 낡은 진입 규제와 경쟁을 저해하는 규제 영역에 적용되는 것은 환영한다. 다만 개인정보보호와 같이 기본권과 직접적관련된 규제 영역에 무분별하게 적용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윤문용 녹색소비자연대 ICT정책국장은 “사전 규제를 완화한다면 사후적으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사후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규제 샌드박스가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관련 입법 절차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즉 ICT 분야에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려면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이 필요하다. 장석영 4차산업혁명위원회 지원단장은 “신제품이나 신서비스에 기존 법 적용을 배제하려면 다른 법에 그걸 배제하는 조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소속 신경민 의원 측은 규제 샌드박스를 규정한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을 이달 중 대표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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