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요계, 가짜 레전드의 범람

입력 2017.10.12. 20:46 수정 2017.10.12. 21:46

어느 분야든 '레전드'란 칭호는 아무에게나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데뷔 연도가 이르고 히트곡 한두개만 있으면 누구나 레전드가 된다.

베테랑이야 수두룩할지언정 레전드는 드문 음악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리하게 '전설'이란 제목을 붙인 탓이다.

이처럼 '제록스 트랙'을 다수 보유한 이들이 방송에서 레전드로 추앙받고 여전히 수익을 올리는 곳이 지금 한국의 대중음악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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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일권의 프로악담러]

끊임없는 표절 시비로 활동까지 중단해야 했던 댄스그룹 룰라. 한겨레 자료사진

어느 분야든 ‘레전드’란 칭호는 아무에게나 부여하지 않는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보통 20년 이상 활동해오며, 다수의 훌륭한 음악을 통해 확실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을 일컫는다. 인정받는 앨범의 보유 여부도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좀 다르다. 단지 데뷔 연도가 이르고 히트곡 한두개만 있으면 누구나 레전드가 된다.

‘전설을 노래하다’란 부제를 단 <한국방송>(KBS)의 <불후의 명곡>은 이 같은 현실을 대변한다. 2012년부터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선 음악적으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이는 물론, 심지어 악의적인 표절 혹은 카피곡을 보유한 이들마저 레전드로 둔갑한다. 베테랑이야 수두룩할지언정 레전드는 드문 음악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리하게 ‘전설’이란 제목을 붙인 탓이다.

지난해 8월 방영된 <불후의 명곡> 263회와 올해 5월에 방영된 <엠넷>의 <너의 목소리가 보여 시즌4>는 룰라를 다뤘다. 두 방송 모두 룰라를 ‘불후의 명곡’을 지닌 ‘진정한 레전드’로 묘사했지만, 실상 이들의 커리어는 표절과 카피로 점철돼 있다. 알려졌다시피 룰라는 타이틀곡 ‘천상유애’를 비롯한 ‘하얀 새’, ‘사랑법’ 등의 수록곡이 대거 표절 시비에 휘말린 3집 탓에 활동 중단까지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이미 그전에도 남의 곡을 노골적으로 베낀 노래를 불렀다.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명곡으로 회자되는 ‘날개 잃은 천사’가 그 노래다. 쿨의 창립 멤버이자 이후 작곡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최준영이 만든 이 곡은, 레게 퓨전 아티스트 섀기의 ‘오 캐롤리나’를 번안곡 수준으로 베꼈다. 이처럼 ‘제록스 트랙’을 다수 보유한 이들이 방송에서 레전드로 추앙받고 여전히 수익을 올리는 곳이 지금 한국의 대중음악계다.

특히 1980~90년대에 활동한 아티스트들을 거론할 때면 조건반사라도 하듯이 레전드로 치켜세워주기 바쁘다. 하지만 한국 가요의 황금기라는 1990년대는 냉정하게 말해서 표절과 카피의 천국이기도 했다(물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 작곡가들이 일본 혹은 미국 대중음악의 멜로디를 앞다투어 베껴대거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원곡을 무단도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인터넷 서비스가 발달하기 이전, 고작 티브이(TV)와 라디오 채널 몇 개를 통해 정보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대놓고 베껴도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큰 인기를 누린 가수들 대다수의 곡 중엔 표절이라 해도 무리가 없거나 그 경계를 교묘하게 피해간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문화 대통령’으로 칭송받았던 서태지마저 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기록이란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기록이 미래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적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당장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왜곡된 기사나 평가 한 줄이 후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고 사실로 굳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 방송이나 연예 매체가 다 그렇지’라며 쉬이 넘어가선 안 되는 이유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은 ‘가짜 레전드’를 만들어내고 방관하고 있다.

강일권 <리드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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