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할매국수 먹어 봤능교"
풍국면 등 1930년대 국수공장 맥 잇는 곳도
40년 넘는 '할매 국숫집' 즐비..손님 가득
모리국수 고장 구룡포엔 자연 건조 국수공장 건재
[한겨레]
찜갈비·육개장·막창구이·생고기(뭉티기)…. 대구 시민도 관광객도 두루 인정하는 대구의 대표 음식들이다. 그러나 대구 토박이 미식가 중엔 ‘국수’가 대표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배경엔 1933년 설립된 국수공장 ‘환길제면’의 맥을 이어온 ‘풍국면’이 있고, 삼성그룹의 전신 삼성상회가 만들던 ‘별표국수’, 그리고 소표·곰표 등 숱한 국수 브랜드들이 자리한다. 1980년대까지도 전국 국수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던, 대형 국수공장 3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전국 밀가루·국수 소비 최다 도시’라는 대구의 대표적 국수 골목과 유명한 국숫집들을 들여다봤다. 햇빛과 바닷바람에 말려 국수를 만드는, 포항 구룡포의 오래된 국수공장도 찾아갔다.
대구 국수 골목과 국수 맛집들
“대구 하면 국수라. 대구 사람들, 국수 억수로 마이 무요(먹어요).”
대구의 대표적 국수제조업체인 ‘풍국면’ 최익진 대표의 말이다. “왜 글라 카모, 대구 사람 성격이 쫌 급해요. 빨리 후루룩 묵고 치아 뿌리는 국수가 제격이라.” 서문시장 한 국숫집에서 만난 50대 상인은 “하루 한 끼는 꼭 국수로 때운다”고 했다. “맛이 있으니까 먹죠. 면발 좋고, 국물 맛있고, 푸짐하고.” 대구 시내엔 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국숫집이 수두룩하다.
어떤 국수기에 매일 한 끼씩 먹고, 줄까지 서 가며 ‘억수로 마이’ 먹을까. 서문시장에 가면 알 수 있다. 서문시장 식당가 어딜 가나 흔하게 만나는 게 국숫집이지만, 특히 1지구종합상가와 인근 뒷골목에 20여곳의 국수 노점과 10여곳의 국수 전문 식당이 몰려 있다.
평일, 점심이 지난 시간인데도 국수 노점과 식당들은 손님들로 붐빈다. 후루룩, 호로록, 국숫발 빨아들이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일부 식당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도 보인다.
서문시장 국수 골목과 노점의 대표 국수는 뭐니 뭐니 해도 ‘대구 10미’의 하나로 꼽히는 ‘누른국수’(칼국수)다. 누른국수는 ‘홍두깨로 눌러서 만든 국수’ 또는 ‘콩가루를 섞어 누르스름한 색깔의 국수’를 뜻하는, 칼국수를 이르는 경상도 말이다. 국수 노점들은 공장에서 만든 칼국수 면을 쓰는 곳이 많지만, 국수 골목의 식당들은 매일 직접 반죽해 홍두깨로 밀고 칼로 썰어 즉석에서 칼국수를 끓여 낸다. 식당마다 할매·아지매들이 ‘한석봉 어머니 떡 썰듯이’ 노련한 솜씨로 칼국수를 만들어내는 모습 자체가 볼거리다.
주문이 오면, 멸치·무·다시마 등을 우려 낸 육수에 면을 넣고 끓이다, 부추(정구지), 채 썬 호박, 봄동과 비슷한 ‘애기배추’ 등을 넣고 다시 삶아 그릇에 담고, 김 가루, 참깨 가루, 양념장을 얹어 손님 앞에 낸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깊고 진한 국물 맛과 두툼하고 졸깃한 면발의 맛에 한 그릇을 금세 비우게 된다. 반찬으로 나오는 풋고추(또는 매운 고추)를 된장에 찍어 곁들여 먹는 맛도 각별하다.
국수 골목 식당과 국수 노점들에선 칼국수와 함께 ‘건진국수’(칼국수를 삶은 뒤 건져 맑은 육수에 담아 내는 국수)와 ‘칼제비’(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어 내는 것), 잔치국수, 비빔국수 등도 먹을 수 있다. 가격도 착하다. 3000~4000원.
대구에서 국수를 얘기할 때 칼국수만 입에 올린다면 서운하다 못해 화를 낼 국숫집이 많다. 전통과 내공의 대명사가 된, ‘할매’ 글자가 들어간 국숫집이 부지기수다. 대구의 국수 애호가들은 ‘4대 할매집’이니 ‘10대 할매집’이니 해서 오랫동안 국수에만 정성을 쏟아온 할머니들께 존경심을 표하기도 한다.
침산동의 ‘칠성동 할매 콩국수’도 그런 곳이다. 47년째 오직 콩국수 하나만 만들어온 곳이다. 걸쭉하고 고소한 콩국물과 졸깃한 중면에 채 썬 호박과 김 가루가 고명으로 올라간다. 된장과 마늘, 풋고추와 매운 고추가 듬뿍 곁들여질 뿐, 별도 반찬은 없다. 고추와 마늘을 곁들여 콩국수를 먹다 보면 정말 잘 어울리는 ‘반찬’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육국수’도 대구의 별미 국수 중 하나다. 육개장과 국수의 조합이다. 얼큰한 ‘따로국밥’에서 밥을 면으로 대체했다고 보면 된다. 중앙동 뒷골목 옛 한옥의 진골목식당, 중동 대로변의 지산골가마솥국밥집 등이 육국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진골목식당의 육국수는 얼큰한 육개장 맛이고, 지산골 육국수는 칼칼한 쇠고깃국 맛이다.
잔치국수로 유명한 곳도 많다. 노원동1가 공장지대 뒷골목의 국수마을은 40년 가까이 푸짐한 잔치국수를 내온 허름한 식당이다. 미지근하고 매콤한 육수에, 치자 물을 들인 노란 소면이 큼직한 알루미늄 그릇에 가득 담겨 나온다. 양을 ‘적게’ 주문하면 좀 작은 그릇에 내준다. 매운 고추와 된장, 깍두기가 곁들여진다.
이밖에 대구에서 각 면류의 대표 식당들로, 원조동곡할매손칼국수(칼국수), 봉무할매묵집(도토리묵국수), 대동강(평양냉면), 강산면옥(김치말이냉면), 중화반점(야끼우동), 진흥반점(짬뽕) 등이 이름 높다.
구룡포 ‘해풍국수’와 모리국수
포항 구룡포는 과메기와 대게의 고장이다. 그러나 국수 좋아하는 이라면, 구룡포 여행길에 들러볼 만한 곳이 있다. 구룡포초등학교 앞 골목의 국수공장이다.
50년째 전통 자연건조 방식으로 국수를 만들어온 곳이다. 국수를 뽑아 가게 뒤뜰에 널어 햇빛과 바닷바람으로 건조시킨다. 현대화된 시설에서 대량으로 급속건조시키는 국수 생산이 일반화된 요즘, 이렇게 옛날 식으로 국수를 만드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해풍국수’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제일국수’다. 70년대까지 구룡포에 국수공장이 8개나 있었지만, 이제 제일국수공장만 남았다.
“여기서 내 스물아홉부터 했니더. 저 기계도 이 저울도 옛날 그대롭니더.” 주인 이순화(79)씨는 56살에 남편과 사별한 뒤엔 혼자 반죽하고 재단하고 면을 뽑아 널어 말리며 옛날 방식의 국수를 만들어왔다.
국수가 완성되려면 “맑은 날엔 이틀 꼬박 걸리고, 흐린 날엔 사나흘도 걸린다.” 1시간 남짓 햇빛에 1차로 건조시킨 다음 실내로 들여와 15시간 정도 숙성시키고, 다시 바깥에 널어 완전히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졸깃한 면발의,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스민 ‘해풍국수’가 만들어진다. 소면·중면·칼국수 세 가지를 생산한다. ‘할매국수’ 등 제일국수공장 앞 골목의 국숫집들에서 ‘해풍국수’로 말아 내는 잔치국수를 맛볼 수 있다.
구룡포의 또 다른 명물 국수가 ‘모리국수’다. 옛날 뱃사람들이 팔고 남은 해산물을 가져와, 모두 한데 몰아넣고 국수를 넣어 끓여 먹던 데서 비롯했다는 푸짐하고 얼큰한 칼국수다. 7~8년 전 한두 곳이던 모리국수 집은, 이제 구룡포읍 골목마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늘었다.
탁자 4개가 놓인 좁은 공간에서 50년째 모리국수를 내온 이옥순(74)씨의 ‘까꾸네모리국수’가 대표 격이다. 이 집 국수엔 아귀 내장 등을 끓여 만든 걸쭉한 육수에 생아귀·건새우·홍합 등 해산물과 콩나물이 듬뿍 들어간다. 면은 대구 ‘풍국면’의 칼국수를 쓴다. 얼큰하고 푸짐한 맛을 즐기기 위해 지역민도 관광객도 줄을 선다.
대구 포항/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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