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이 갈라놓은 50년 꿈에 그리던 첫사랑을 만나다

2017. 10. 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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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씨와 에텔 '반세기만의 재회

[한겨레]

지난 9월30일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김판수(오른쪽)씨와 에텔 티칸데르(왼쪽)는 2박3일의 짧은 재회를 아쉬워하며 또 다시 이별을 했다. 이날 아침 김씨가 50년만의 재회를 기념해 깜짝 선물 50송이 장미를 가슴에 안은 에텔이 모처럼 활짝 웃었다.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전례없는 열흘간의 연휴로 신문마저 긴 침묵에 잠긴 사이, 페이스북 세상에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킨 ‘50년만의 첫 사랑 재회기’가 있다. 올해 나이 일흔 다섯,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도금 전문기업 호진플라텍의 창업주이자 대표인 김판수씨가 지난 1~3일 페북 담벼락에 실시간으로 공개한 ‘덴마크의 옛 친구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가 찾은 옛 친구는 일흔 두 살 핀란드인 에텔 티칸데르, 두 사람은 1967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45km 떨어진 작은 도시 헬싱외르에 있는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를 함께 다니며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유학을 마친 김씨가 그해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영어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애틋한 우정을 이어갔다. 하지만 69년 5월 이후 인연은 돌연 끊겼다. 김씨가 이른바 ‘유럽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 로 5년형을 받고 수감됐기 때문이다. 그후로도 수년간 한국 사정을 알 길 없던 에텔은 애타게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답장은 없었다. 김씨는 헬싱외르에서 1년간 영화 공부를 하던 1967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노수 교수와 함께 동베를린을 다녀온 것이 빌미가 되어 69년 ‘간첩 올가미’를 썼다. 광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광주서중·광주일고·서울대 선배였던 박 교수의 후원으로 서울대 영문과 3학년을 마치고 런던에서 유학 중 덴마크로 잠시 건너간 것이었다. 5년 가까운 실형을 마치고 73년 석방된 그는 수재로 촉망받던 9남매의 장남이 빨갱이로 몰리는 바람에 풍비박산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들도 키우며, 유학시절 닦은 영어와 감옥에서 배운 일어 실력으로 직접 기술을 익히고 개발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도금약품과 도금기술 전문업체인 호진플라텍을 일궜다. 그렇게 40여년이 흐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박노수·김규남을 사형시킨 69년의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이므로 재심 등을 청구할 것을 권고했고, 2013년 서울고법의 무죄 선고가 나왔다. 2015년 12월 대법원에서도 최종 확정판결을 받았다. 확정판결 직전인 2015년 9월, 마침내 김씨는 에텔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2년 뒤, 두 사람은 50년 전 눈물로 헤어졌던 코펜하겐에서 다시 만났다. 25살 청년과 22살 처녀로 돌아간 두 사람은 9월28~30일 2박3일간 기적 같은 추억여행을 나눴다. 분단국가 한국의 야만적인 현대사가 낳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과 재회’를 코펜하겐 현지에서 프리랜서 기고가 이보영씨가 지켜봤다. 핀란드에 살며 맨처음 페이스북 검색을 통해 ‘에텔’을 찾아준 사랑의 메신저인 이씨의 동행기를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덴마크 유학시절 애틋한 우정
귀국 1년여만 69년 ‘유럽간첩단’ 얽혀
억울한 옥살이 5년새 연락 끊겨

“당신을 수천번도 더 꿈꾸는데…”
절절하게 직접 쓴 페이스북 메시지에
작년 봄 드디어 답신이 왔다

지난 9월28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한 김판수씨와 마중나온 에텔의 ‘50년만의 포옹’.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먼 거리에서 누군가 번쩍 두 팔을 치켜들고 환호하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정말 너 에텔이 맞는 거니?...두 손으로 감싸안은 그의 노쇠한 얼굴에서 저 길고 길었던 50년 세월의 무게가 어쩐지 몹시 슬프게 느껴졌다. 웃고는 있어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한 애잔한 마음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에텔’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김서령 작가가 핀란드를 방문했던 2015년 초였다. 김 작가는 도착하자마자 ‘에텔 티칸데르’라는 핀란드 여성을 찾아달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내게 불쑥 던져주었다. 김 작가는 2008년 김판수씨의 억울한 간첩 누명기를 최초로 인터뷰해 한 시사잡지에 소개했다. 그때 김씨는 수십년 가슴에 묻어두었던 ‘첫 사랑 에텔 이야기’도 김 작가에게 털어놓았지만 세상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이었다고 했다.

5년 가까운 옥살이를 하는 사이 연락이 끊겨버린 첫 사랑을 50년 가까이 찾고 계신다는 안타까운 사연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550만명이나 되는 핀란드 인구 속에서 어떻게 찾나. 잠시 고민하다 전 세계 70억 넘는 인구의 4분의 1이 연결돼 있다는 페이스북에 일단 의지해보기로 했다. ‘Ethel Tikander’ 철자를 추리해서 이름을 쳐 넣으니 생각보다 쉽게 한 명이 나타났다. 과연 페이스북의 힘이란!! 거주지가 덴마크이고 사진도 있어 분명 맞는 것 같았다.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또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김판수씨가 몹시 실망스러워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67년 덴마크 헬싱외르에 있는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에서 첫 사랑 인연을 맺던 시절의 25살 한국 유학생 김판수씨. 서울대 졸업반 시절 영화 공부를 하러온 촉망받던 영문학도였다.
1967년 덴마크 헬싱외르에 있는 국제학교 유학시절 교정에 서 있는 22살 핀란드 여학생 에텔 티칸데르. 김판수씨가 직접 찍어 50년간 소중하게 간직해온 사진이다.

그리고 2년 반이 흐른 지난 9월, 역시나 불쑥 페북으로 김 작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판수 선생님이 드디어 에텔을 덴마크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 2015년 9월 김판수씨가 직접 페북에 남긴 메시지를 보고, 2016년 봄 에텔이 침묵을 깨고 답신을 보낸 것이었다.

“당신을 수천번도 더 꿈 꾸었던 나, 김판수에요.”

“나는 오랫동안 당신의 페북 메시지에 답장하는 것을 망설였어요. 왜냐하면 제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어요. 나는 단 한번도 성공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고, 정상적인 가족 생활도 또 좋은 직업도 누려본 적이 없어요. 홀로 있다는 것이 내 삶의 지속적인 벗이에요. 아이 둘도 제가 다 혼자서 키웠어요.”

지난 9월28일 재회 첫째 날, 코펜하겐에서 50년만에 에텔과 상봉한 뒤 김판수씨는 해질녘 해변길 산책에 나서 그 유명한 인어공주상 앞까지 가봤다. “1967년 여름 중고 모터스쿠터를 타고 혼자 시내를 쏘다닐 때 보았던 기억보다는 작지만 외로운 모습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있는 듯하다.”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마침내 올 가을 김판수씨가 코펜하겐으로 만나로 오기로 한 뒤, 보낸 에텔의 메시지는 더욱 눈물없이 볼 수 없었다. “김에게, 미안해요 머물 곳을 제공하지 못해서요. 제가 집이 없거든요.”

내 마음도 이렇게 아픈데 김판수씨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에델을 배려하고자 애초 동행하기로 했던 김 작가와 나는 일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 비행기표는 취소가 불가한 할인티켓이어서 코펜하겐으로 나홀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도착한 날, 고맙게도 에텔의 동의를 받았기 때문에 숙소로 와도 좋다는 김판수씨의 메시지가 왔다.

김판수씨가 ‘지중해 바다처럼 파란 눈빛을 가진 소녀’로 기억하며 간직해온 에텔 티칸데르의 22살 모습.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눈빛이라고, 김판수씨가 ‘지중해 바다처럼 파란 눈빛을 가진 소녀’라고 묘사했던 에텔이 그 눈빛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파쩨르 초콜릿과 핀란드 호밀빵 모양으로 만들어진 냄비 받침을 선물하자, 에텔은 진짜 호밀빵인줄 알고 먹어 보려고 했다. 뜻하지 않는 장난끼로 어색함은 금방 녹아버렸다.

한 여인의 기나긴 외로움의 시작은 자의는 아니었지만 김판수씨의 ‘미스테리한 실종’이었으리라. 감옥에 갇혀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Mr. Kim’에게 수년간 끊임없이 보냈던 에델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결혼했나요? 아님 여자친구가 생겼나요?”

1969년 ‘유럽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으로 5년 실형을 받은 김판수씨가 옥중에 있던 70년 4월 에텔이 보낸 편지. 김씨의 사정을 알 길 없던 에텔의 안타까운 편지는 수년간 계속됐다. 하지만 영어로 된 편지의 사연을 모르는 가족들이 옥중의 김씨에게 전하지 않은 채 보관만 해둔 까닭에 73년 석방된 뒤에야 김씨에게 전달됐다.

‘50년 마음의 빚’을 풀어낸 김판수씨의 얼굴은 내내 흥분으로 들떠 있는데 반해, 에텔의 표정에서는 세월이란 체로 충분히 걸러진 듯 미소가 잔잔히 번져나갔다. 누가 이 여인을 불행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에텔이 부러워졌다. 50년 동안 나를 그리워하다가 나를 만나러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기적같은 사랑이 요즘 세상에 어디 흔한 일인가? 그들의 대화에서는 ‘사랑’이란 말 대신 ‘우리의 우정’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두 사람은 1967년 헤어질 때 마지막 포옹을 나눴던 코펜하겐 중앙역을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다. 김판수씨가 그날 역에서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목놓아 엉엉 울었다고, 에텔이 ‘증언’을 했다. 사실 그때 20대의 젊은 그들은 불과 몇달의 짧은 이별로 생각했단다. 50년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 그 모진 시련을 겪어내고 그들은 다시 그 역 앞에 섰다. 예전의 진한 포옹과 눈물은 다 사라졌지만 두 사람의 눈빛만은 여전히 강렬한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번에도 역에서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불과 12시간만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 내일 아침 함께 다녔던 국제학교를 방문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10월2일, 코펜하겐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시간 남짓 달려, 학교가 있는 헬싱외르에 도착했다. 그곳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대표적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 성이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지난 9월29일 재회 두번째 날, 김판수(왼쪽)씨와 에텔 티칸데르(오른쪽)는 50년 전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헬싱외르의 국제학교를 다시 찾아가 앞마당에서 그네를 타며 젊은 날의 추억을 되새겼다. “우리들의 정이 무르익어 갔던 강의실, 강당, 식당, 기숙사 방들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과도 잠간 담소, 50년 만의 방문이라고 하니 무척 신기한 듯 학교 자랑을 늘어놓는다....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의 정경, 잘 가꾸고 정돈된 미술관 자체의 아름다움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국제학교 교직원은 50년 만에 졸업생들이 다시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더니 자신이 1967년생이라며 놀라워하며 앞장서 안내를 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들만의 타임머신을 탄 듯, 앞마당에서 그네도 타고 교정 안팎을 즐겁게 거닐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있고 호수를 끼고 있는 이 평화로운 교정에서 공부했던 김판수씨가 한국의 춥고 어두운 독방 옥살이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감옥 생활이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 보냈던 찬란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10월3일,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지막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에델은 우리가 극구 말렸는데도 모두에게 대접하고 싶다며 코펜하겐의 유명한 빵집에서 데니쉬 페이스트리와 커피를 직접 테이크아웃해왔다. 외모만 조금 다를뿐, 마음 씀씀이는 우리네 정 많은 할머니와 별반 다름이 없다. 에텔은 자신에게는 먼먼 옛날 아시아에서 이동해서 핀란드에 정착한 원주민 ‘사미족’의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가 더 이상 낯선 벽안의 외국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9월30일 재회의 마지막 날, 김판수씨가 에텔에게 ‘50년 세월 마음의 빚을 담은 50송이 장미꽃다발’을 깜짝 선물하고 있다. “장미꽃 50송이는 순전히 나와 동행한 회사 전무의 아이디어. 재회 50년을 상징하고 기념, 자축하는 의미로는 안성마춤이었다. 꽃다발을 건네받고 상상하지 못했던 선물에 놀라고, 기뻐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라니...순탄치 못하고 외롭게 살아온 듯한 에텔에게 짧으나마 조그마한 위로와 행복감을 맛보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따뜻한 커피를 나누던 순간, 에텔에게 ‘50송이 장미꽃’ 서프라이즈 증정 이벤트가 연출됐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처럼 환하게 웃었다. 헤어진 세월 50년을 상징하는 50송이였다.

평소 동양의 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에텔은 카르마(Karma)도 얘기했다. 에델은 이번 생에서는 짧은 만남, 긴 그리움의 인연이었지만 다음 생애에서는 긴 만남을 믿냐고 김판수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었다. 웬일인지 김판수씨는 쉽게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때로는 언어가 다다르지 못하는 그런 영역이 존재한다. 그는 지금 그 곳에 홀로 서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지난 9월30일 재회 마지막 날,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준비하며 김판수씨는 50년동안 간직해온 편지들의 복사본과 다시 만나 함께 한 2박3일 추억여행을 기록한 사진들을 에텔에게 선물했다.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 9월30일 마지막 날, 또 다시 찾아온 이별의 시간.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50송이 장미꽃다발을 안은 채 기차를 타고 1시간 거리 근교의 집으로 떠나는 에텔에게 김판수씨가 손을 흔들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제로부터 50년 뒤라면 2067년이 된다는 말에 .서로 폭소를 터트리면서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의 비정함에 새삼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내 청춘의 한 때, 그리고 오랜동안 그리워했던 옛 친구에게 세상의 모든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김판수씨 페이스북 갈무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다. 긴 그리움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약없는 헤어짐은 매한가지지만 에델은 장미 50송이를 들었는데도 처음보다 가벼운 발걸음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입에서 나온 ‘힐링’(회복)이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으리라.

“에텔, 앞으로는 절대로 당신의 운명을 창피해 하지 마세요. 삶이 더이상 당신을 속이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에게 보여준 당신의 부드러운 미소를 앞으로 절대로 잃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코펜하겐/이보영·프리랜서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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