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부터 SF까지..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

조용호 2017. 10. 6.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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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 우리시대의 상실, 유려하게 그려내

2017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는 역사소설에서 추리소설,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우리시대의 상실을 유려하게 그려내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 상실의 정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가족이 이민을 떠나면서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이방인 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작가란 “트라우마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뭔가 평형을 잃은, 어렸을 때 절대 낫지 않는 일종의 상처를 받은” 존재들이라면서 “몇 주씩 방에 갇혀서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말하자면 그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것”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켄트 대학과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수학한 후 런던에서 작품을 써온 이시구로는 1982년 발표한 첫 소설 ‘창백한 언덕풍경’으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다. 영국에 거주하는 일본 출신 중년 여인 에츠코의 시선을 통해 나카사키 원폭 투하 이후 일본의 황폐한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전쟁 시기에 선전 예술로 정치에 휘말리게 되는 화가 이야기를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 나가야 하는지 질문하는 두 번째 장편 ‘부유하는 세상의 예술가’로는 휘트브레드 상과 이탈리아 스칸노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1989년 부커 상을 받았고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국 귀족의 장원을 자신의 세상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남자 스티븐스의 인생과, 그의 시선을 통해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영국 저명한 저택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생애 첫 여행을 떠나면서 그가 헌신해 온 영국 최고 저택의 주인이 나치에 이용당했음을 알면서 허망한 상실감 속에서 인간의 품위에 대해 말한다. 이 작품으로 이시구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영미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확실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에도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심리를 몽환적으로 그린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로 첼튼햄 상을 받았다. 고향’의 문제를 천착한 ‘우리가 고아였을 때’(2000)는 이시구로의 개인적 체험이 가장 많이 담긴 사적인 소설로 꼽힌다. 다시 부커 상 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된 이 소설 속에서 고국은 영국이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정체성을 고민하는 크리스토퍼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그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 이 작품은 “아무도 죽지 않는 영국과도 같았던 상하이의 조계, 그 안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크리스토퍼의 노스탤지어가 담긴 한 편의 아름다운 엘레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발표한 ‘나를 보내지 마’는 복제 인간의 사랑과 슬픈 운명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의문을 제기한 작가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으로 ‘타임’의 ‘100대 영문 소설’ 및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고, 전미 도서협회 알렉스 상, 독일 코리네 상 등을 받았다. 이 작품 이후 10년 만에 발표한 ‘파묻힌 거인’에는 망각의 안개가 내린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무대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더 타임스’ 선정)에 들 만큼 현대 영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명성보다는 동양과 서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시구로만의 낯설고 깊은 상실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파묻힌 거인’에는 개인 혹은 인류의 기억과 망각,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용과 기사가 등장하는 환상적인 배경 속에 펼친다.

‘녹턴’(2009)은 황혼과 사랑에 대한 5개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제1,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에서 추리소설,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지만, 인간 존재 자체에 주목하고 인간의 삶의 방식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작품 전반에 음악이 흐르는 것도 특징이다. ‘녹턴’에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 노력하며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본질을 음악과 함께 그려낸, 사랑과 세월에 관한 단편들이 모여 있다. 

젊은 시절 이시구로는 소설을 발표하기 전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는 가상의 팝가수의 노래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프이고,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직접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들도 모두 부드럽고 정교하게 흘러다가다가 말미에는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잔잔한 클래식 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평가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대영제국 훈장을, 1998년 프랑스 문예훈장을 받았다.

인터넷서점 예스24 집계에 따르면 가즈오 이시구로는 수상일 기준 지난 1년간 저서 판매량이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운데 오르한 파묵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는 그의 작품 8권이 모두 번역돼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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