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의 軍] 적폐청산에 발목잡힌 軍 "미래 생각할 여유 없다"

박수찬 2017. 10. 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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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행정부처마다 가장 많이 들리는 소식이 위원회와 태스크포스(TF) 신설이다. 정부 조직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TF 신설을 억제했던 기존 추세와는 다른 현 정부의 모습에서 한 가지 공통적인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적폐청산’이다. 과거 정권에서 발생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것이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국방부 관계자들과 함께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본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행정부처 가운데 하나인 국방부도 마찬가지다. 불법 민간인 사찰, 정치와 선거 개입, 간첩 조작 등 지난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결과를 계속 발표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에 이어 적폐청산 관련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부처가 국방부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이래 북한이 일본 열도를 넘어서 태평양으로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와중에도, 사상 최대 규모의 6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그 순간에도, 국군의 날 69주년을 축하하는 와중에도 국방부의 적폐청산은 쉬지 않고 지속되어왔다.

문제는 과거의 악습을 타파하는데 몰두하는 것과 달리 우리 군과 한미 동맹의 현재 및 미래의 전략을 세심하게 구상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는데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덕과 무차별적인 트윗 공세 속에서도 국방정책의 중심을 잃지 않으며 미군 조직을 보호하는 펜타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송영무(오른쪽 두번째) 국방부 장관이 25일 군 적폐청산위원회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환담을 나누고 있다. 국방부 제공
◆“적폐청산만 하다 남은 한 해 다 보낼 판”

적폐를 바로잡겠다며 국방부가 만든 TF는 △군 의문사 조사 제도 개선 추진단 △사이버사령부 댓글사건 재조사 TF △군 적폐청산위원회 △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5.18 특조위) △국방개혁추진단이다.

지난 25일 첫 회의가 열린 군 적폐청산위원회는 사이버사령부 댓글 조사와 인권침해 성폭력 방지 및 제도개선, 갑질 행위 근절 및 사조직 근절, 기무사 사찰 조사, 방산비리 척결 및 제도개선, 군 의문사 진상규명, 좌우 극 편향 안보교육 제도개선, 병역비리 근절 및 제도개선 등에 대한 의제를 선정했다. 11일 출범한 5.18 특조위는 지난달 23일 문 대통령의 진상조사 지시에 따라 구성됐다. 특조위는 헬기 사격 논란과 관련해 광주 전일빌딩을 방문하는 등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국정원 댓글사건이 검찰 수사로 번지자 8일 30명의 수사관이 참여하는 사이버사령부 댓글사건 재조사 TF를 구성해 가동에 들어갔다. 1일에는 군 의문사 조사 제도개선 추진단을 만들어 군 의문사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국방개혁추진단도 이달 초부터 가동되면서 내년 초 국방개혁안을 발표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열리는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해 송영무 장관과 열병하고 있다. 평택=남제현 기자
국방부가 운영중인 5개의 TF에 대한 군 안팎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다. 우선 국방부가 의제를 주도하기 위해 만든 TF가 적다. 5.18 특조위와 국방개혁추진단은 문 대통령의 지시나 언급이 나온 후 설치됐다. 사이버사령부 댓글사건 재조사 TF도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댓글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면서 사이버사령부로 파장이 확산되자 만들어졌다.

5.18 특조위와 사이버사령부 댓글사건 재조사 TF는 과거 사건의 진상 규명이라는 활동 목표가 뚜렷하다. 하지만 과거의 조사 결과와 다른 결론이 도출되면 군의 신뢰에 악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면 ‘그럼 그렇지’라는 평가 속에 더 큰 후폭풍에 직면한다. 수개월 동안 적폐청산에 올인했는데 결과물이 없다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몰리게 된다. 

28일 오전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건군 69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특전사 대원들이 특공무술을 선보이고 있다. 평택=남제현 기자
일부 TF는 맡은 임무가 중복된다. 국방개혁추진단은 군 구조 개편과 국방운영개선, 장병 인권보장, 복무여건 개선, 방위사업 비리 척결 등을 맡고 있다. 군 적폐청산위원회와 군 의문사 조사 제도 개선 추진단의 업무와 중복된다. 심도 깊은 고려 없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TF를 만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국방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적폐청산에 나서는 것만큼 미래의 국방에 대한 정책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국방개혁추진단이 가동되고 있고 국방개혁 2.0이라는 용어가 계속 쓰이지만 대선 당시 발표됐던 국방 분야 공약 이상의 구체적인 것은 공표되지 않고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고도화되면서 주한미군에 전술핵을 재배치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불안감이 확산됐지만 국방부는 불안을 불식시킬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은 국방부 장관의 참모역인 실장급 고위공무원 인사가 지지부진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는 지적이다. TF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려면 기존 실국 등 국방부 내 조직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방부에서 송영무 장관과 서주석 차관을 제외한 주요 실장들은 박근혜정부 당시 임명됐던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임 정부서부터 추진됐던 정책은 계속 집행할 수 있지만 거시적 차원의 새로운 국방정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장관과 차관에 이어 국방부 서열 3위로 평가되는 국방정책실장은 지난 6월 사드 발사대 추가반입 보고 누락 파문으로 위승호 당시 실장이 물러난 직후 지금까지 공석이다. 핵우산을 비롯한 미국의 확장억제 등 한미 동맹 사안과 군사외교, 주요 국방정책을 총괄하는 국방정책실장의 공백이 길어지면 새로운 국방정책을 구상하거나 집행하기가 어렵다.

당국이 북한의 제6차 핵실험 도발에 대응해 미사일 발사훈련으로 대북 무력 응징시위에 나선 4일 오전 인천시 중구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휴가를 마친 해병대원들이 백령도행 여객선에 오르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실제로 지난 27~28일 고도화되는 북핵 위협 속에서 진행된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는 기존의 합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국방정책실장이 수석대표를 맡아야 했지만 공석이라 그 밑의 정책기획관이 직무대리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미국측도 수석대표가 직무대리였다는 점에서 이같은 결과는 예견됐다는 평가다. 이를 두고 군 안팎에서는 “대리가 대리를 만났다”는 우스개소리마저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군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다지는데 있어 국방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군을 대표하는 기관이자 행정부처의 일부로서 청와대와 군을 연결하는 정무적 역할도 맡는다. 정무적 역할이 잘 수행되면 청와대와 군의 신뢰 관계도 증진된다. 손목에 내상(內傷)을 입어 수술을 받은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수술 후 재활을 통해 상처를 회복한 사람은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세심하게 움직여야 한다. 자칫하면 상처가 도져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청와대와 군의 관계는 사드 발사대 추가 반입 보고누락 의혹으로 위승호 당시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이 사실상 경질되면서 ‘신뢰의 저하’라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군 관계자는 “사드 잔여 발사대 추가반입 보고 누락 의혹 사건은 청와대와 군의 상호 신뢰관계에 큰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봉합하려는 시도도 없었기 때문에 (상호)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청와대와 군의 의사소통을 도우면서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 한편 안보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심한 정무감각이 필수다. 이는 군이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자산인 ‘신뢰’ 확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송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문정인 청와대 통일외교안보특보에게 직격탄을 날렸다가 청와대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대통령의 참모로서 직언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직언을 하더라도 외교안보라인과 대통령의 의중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비춰지는 것은 군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는 결과만 낳는다. “쓴소리 잘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얻은 대가가 불신을 부채질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값비싼 대가다.

송영무 장관이 7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대리를 만나 환담을 나누며 이동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의 행보는 우리 국방부에 좋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매티스 장관은 해병대 출신으로 미친 개(Mad dog)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군인이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 취임 직후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이고 분노를 유발하는 행동에 조용히 맞서면서 안보정책의 중심을 잡고 군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정무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22일 보도에 따르면, 매티스 장관은 대통령이나 고위 관리들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 사태를 일으킨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자 매티스 장관은 군인들에게 “우리나라가 상호 이해와 존중으로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해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언행을 비판한 효과를 거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매티스 장관이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보다 더 진보적이라면서, 주변사람들에게 “매티스는 민주당원”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그를 존중한다. 덕분에 미 국방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국방정책을 재량껏 추진하고 있다.

적폐청산과 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함께 가야하는 의제다. 그러나 국방부는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미처 갖추지 못한 채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적폐청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다 털고 가자”라며 과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들춰내면 당장은 속이 시원할 수 있다. 하지만 적폐청산 직후 군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방안이 없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혁파한 뒤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를 제시하지 못해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처럼 적폐청산도 개혁도 실패한다. 군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최대한 빨리 완성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적폐청산보다 더 중요한 국방부의 임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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