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또 다른 정의론 역작 “문제는 정치다”읽음

김유진 기자

차이의 정치와 정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 지음·김도균·조국 옮김 | 모티브북 | 566쪽 | 3만원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개적으로 특정 집단을 차별하거나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금기시된다. 그럼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소속과 정체성을 이유로 ‘구조적 억압과 지배’의 대상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쓴 아이리스 영은 사회정의가 여성, 유색인과 소수인종, 동성애자, 노인, 장애인 등 억압받는 집단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미얀마 군부의 강제진압으로 추방 위기에 처한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위해 기도하는 필리핀 무슬림 소년들(왼쪽 사진)과 이민자들과 유색인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하는 미국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 모습. EPA·AP연합뉴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개적으로 특정 집단을 차별하거나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금기시된다. 그럼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소속과 정체성을 이유로 ‘구조적 억압과 지배’의 대상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쓴 아이리스 영은 사회정의가 여성, 유색인과 소수인종, 동성애자, 노인, 장애인 등 억압받는 집단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미얀마 군부의 강제진압으로 추방 위기에 처한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위해 기도하는 필리핀 무슬림 소년들(왼쪽 사진)과 이민자들과 유색인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하는 미국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 모습. EPA·AP연합뉴스

몇 해 전 한국 사회를 강타한 화두는 ‘정의’였다. 정치철학서로는 이례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특강을 위해 방한한 샌델은 슈퍼스타급 대우를 받았다. 존 롤스의 <정의론>과 같은 딱딱한 고전도 주목을 받았다. 현직에 있던 대통령은 샌델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최근 그의 임기 동안 국정원의 전방위적인 정치 개입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등이 행해진 사실이 밝혀진 것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당시 정부는 정의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책과 삶]또 다른 정의론 역작 “문제는 정치다”

이번에 출간된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가 그때만큼이나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여성 정치철학자인 저자가 1990년에 쓴 책이다.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낸 영은 2006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애당초 샌델과 같은 ‘하버드’ 브랜드 팔이가 불가능한 조건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정의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미덕이 풍부하다. 저자는 정의를 물질적 재화의 분배에 국한해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탈피해, 정의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구조적 억압과 지배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억압은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폭력이라는 다섯 가지의 범주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표되는 계층 간 대립이 공고화되고, 여성이나 외국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 ‘인간 존재들의 위계화·서열화를 철폐하려는 정의론’이라는 공역자들의 설명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사회에 살고 있고, 어느 정도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 책임이 있는 우리에게 영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게 들린다.

“정의에 관한 합리적 성찰은 듣는 것에서부터, 어떤 외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체가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다른 방법이 있다. 타인과 조우하는 것이다.” 책 속의 구절이다. 이론서의 틀에 박히지 않은 문장이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저자는 책의 상당 부분을 사상가나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토대로 개념을 정리하고 논지를 전개하는 데 할애한다. 하지만 학술적 서술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은 사회 정의의 과제들을 말하는 대목은 호소력이 크다.

책의 이런 특징은 저자 스스로 이론과 실천이 괴리되지 않은 삶을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영은 1960~1970년대 미국을 달군 여성운동과 여러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내 개인적인 정치적 열정의 출발점은 페미니즘”이라며 여성운동에 참여하며 억압을 ‘식별’해낼 수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다. “나의 페미니즘은 국외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운동과 미국 내의 많은 사람들을 여전히 가난하게 만들고 차별받게 하는 사회 상황을 재구조화하자는 운동의 신조를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것에 의해 항상 보완되어 왔다”고도 밝힌다.

자신의 지적 작업이 소수자들의 운동에 빚지고 있다는 인식도 내비친다. “백인에다 이성애자이며, 중산층이면서 비장애인이고, 비노인 여성인 나는 흑인, 라티노, 아메리카 인디언, 빈민, 레즈비언, 노인, 장애인의 급진 운동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들 없이는 나 역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정의롭다’는 외침은 정의 철학자들보다 먼저 있고, 이들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 속에 언제나 위치한다”는 말은 그가 평생 학문에 임한 태도를 압축한다.

책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5장 ‘몸의 등급 매기기와 정체성의 정치’다. 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대한 분석은 1990년 미국과 2017년 한국 사이의 시차를 일거에 지워 버린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공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차별적 언행을 하는 풍토가 거의 종식된 듯했지만, 사생활 영역이나 무의식적인 차원의 편견은 여전했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정신의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이론을 빌려와, 무의식적 혐오 반응의 근원을 탐구한다. “몸짓, 비공식적 언급, 추함의 판단, 불편한 감정”으로 드러난 억압 역시 부정의에 속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동성애공포증은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눈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고, 쉽게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어도 동성애에 대해서만큼은 ‘비합리적 역겨움’을 드러내는 현상은 호모포비아가 얼마나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노인차별주의와 장애인차별주의 역시 경계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한다. 노인은 나의 미래의 모습이자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면하거나 노인을 아이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인 혐오는 사회적인 대처가 쉽지 않다. 일례로 성희롱이나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으레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억압을 핵심으로 다루는 정의론에서는 아무리 고의가 없었다고 해도 이 문제를 가볍게 다뤄서는 안된다. 인식하지 못하고 저지른 차별을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반드시 책임을 물어 ‘처벌’해야 한다. 여기서 처벌이란, “인신 구금, 배상, 단체에서의 제명, 특권의 박탈, 공적 견책, 사회적 추방”을 두루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 성차별·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거나 심지어 책에 쓰고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비춰보면 ‘책임 묻기’는 너무도 아득한 과제처럼 들린다.

영은 정의 개념이 ‘정치적인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입장이다. 롤스를 비롯해 정의를 연구한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분배 패러다임은 정의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날을 세운다. 정의는 제도화된 억압과 지배가 제거된 상태, 또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며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국가 역시 전문가에 의한 사회적 이득의 분배에 치중함으로써 의사결정 권력이라는 쟁점을 도외시한다는 맹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사회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첫걸음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의 존재와 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책의 제목이기도 한 “차이의 정치”가 관건이 된다. 이는 정치적 평등의 관점에서 대두한 ‘평등 대우’ 원리를 때로는 피억압 집단을 ‘특별 대우’하는 조치로 대체해야 함을 뜻한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휴가나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 이중언어교육을 받을 권리, 소수인종을 위한 적극적 차별 시정조치 등이다.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의 거두인 영의 저작 중 여태껏 국내에 소개된 것은 2013년 나온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미국에서는 2011년 출간)가 유일하다. 공역자들에 따르면 <차이의 정치와 정의>는 영의 후기 저서들의 토대가 되는 책이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지금의 한국 사회를 향해 말을 거는 듯한 이 책을 본격 입문서로 삼으면 좋겠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한 컷에 담긴 화산 분출과 오로라 바이든 자금모금행사에 등장한 오바마 미국 묻지마 칼부림 희생자 추모 행사 황사로 뿌옇게 변한 네이멍구 거리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