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르포]15년간 쓰레기 방치한 가정..APO가 찾아준 삼남매의 꿈

정준영 2017. 9. 2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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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매 가족, 15년간 쓰레기 속 생활…화재로 출동한 경찰·소방관이 발견
아동학대전담경찰관(APO)…"아동방임 의심"
경찰·소방·구청·주민센터·봉사단체 합심해 쓰레기 3t 청소
향후 가족 모두 상담·정신과 치료 받을 계획

사진=정준영 기자


[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빨리 취직해서 부모님 도와드리고 싶어요"

지난 16일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다세대주택 1층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채모(53)씨가 제대로 끄지 않은 담뱃불이 집에 옮겨 붙은 것이다. 화재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가정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물상에 가까웠다. 먼지와 찌든 때가 낀 식기, 유통기한이 2년이나 지난 컵라면, 곰팡이가 핀 옷가지, 구더기가 들끓는 냉장고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악취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고등학생 삼남매 가족이 살고 있었다. 화재는 금방 진압됐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사진=정준영 기자


채씨와 강모(56)씨는 결혼한 지 15년째 된 부부로, 화재가 난 홍제동에는 4년 전부터 이사와 살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부부는 15년 전부터 집안 정리를 하지 않은 채 지냈다. 삼남매는 모두 비위생적인 집안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집이 가장 편하고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부부가 집안 환경이 비위생적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남편은 "부인이 짐을 버리지 못하게 해 이 상태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반면 부인은 "남편이 청소를 하지 않아 이렇게 됐다"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경찰은 아동방임을 의심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서대문경찰서 여성청소년과와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삼남매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사진=정준영 기자


상담 결과 자영업자인 남편은 평소 부인과 자주 다퉈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계 수입은 상담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부인이 벌어오는 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어려운 경제 형편과 남편과의 잦은 다툼으로 부인은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였다.

한편 삼남매는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두 중상위권 성적의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담임선생님들조차 "화재가 나서야 삼남매의 집안 환경을 알게 됐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삼남매는 "하루빨리 취직해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다"고 했다. '장래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것은 삼남매에게 사치처럼 보였다.

사진=정준영 기자


지난 25일에는 아동학대전담경찰관(APO)과 아동보호전문 상담사가 집을 방문해 부모와 면담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부모는 집을 청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5년간 쌓여온 생활용품과 쓰레기들을 가족이 한 순간에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서대문경찰서와 홍은1동주민센터는 관계기관의 협조를 얻어 대대적인 청소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서대문경찰서와 서대문소방서, 서대문구청, 주민센터, 자원봉사단체 소속 30여명이 29일 삼남매 집을 방문해 청소작업을 벌였다.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하니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해 보였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갖가지 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흥건했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음식과 식기가 쌓여 있었다.

사진=정준영 기자


이날 청소에 참여한 봉사자들은 각종 세균과 병원균 감염을 막기 위해 보호복을 입고 작업했다. 방진 마스크도 두 개나 겹쳐 착용했지만 악취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작업 도중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봉사자도 있었다.

물품을 정리하는 가운데 삼남매가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낡은 교과서들이 나왔다. 낡아빠진 기타도 있었다. 안방을 정리하던 경찰이 동전 수백 개가 든 비닐봉지를 발견해 들어보이자 남편이 "아이들 교통비"라며 조심스럽게 받아갔다.

사진=정준영 기자


이날 나온 쓰레기는 총 3t이었다. 1t을 적재할 수 있는 쓰레기수거차량이 세 번 오갔다. 봉사자들이 쓰레기를 실어 나르자 부인 강씨가 "쓸 만한 물건도 있는데 왜 무조건 갖다 버리느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아이들을 이런데서 키웠으면 아동학대"라며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라고 핀잔을 놓기도 했다.

경찰은 부부를 아동학대 혐의로 조치하기보단 보호 및 지원하겠단 입장이다. 정신건강증진센터 연계를 통한 심리 치료와 상담, 부모교육도 실시한다. 경찰 관계자는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경우에는 형사적으로 처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삼남매 가족 모두에 대한 정신과 치료도 진행된다. 부모 뿐 아니라 삼남매도 집안 환경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치료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삼남매 가족에 대한 정신적 상담을 진행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할 계획이다.

담당 구청과 주민센터는 삼남매 가정이 재기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했다. 생활용품을 지원하고 도배, 화단 정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생활을 돕기로 했다.

남편 채씨는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써주신 서대문서 여성청소년과와 주민센터 직원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도움 주시는 대로 잘 따르며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정준영 기자 labr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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