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술 빚는 셰프, 고급요리 수준의 안주 .. 서교동 '한식 주점 얼쑤'

2017. 9. 2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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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주점 얼쑤’는 중심메뉴 몇 가지를 매달 바꾼다. ‘10월의 메뉴’ 대표작은 능이갈비찜이다. 한우 갈비에 밤과 당근을 다듬어 넣고 찜을 했다가 표고·능이를 올려 다시 익힌 다음 상에 낸다. 능이 향이 실내에 진동한다. 여느 주점에서 만나기 어려운 고급 안주다.
오늘 퇴근하면 이 땅에 휴일제도가 도입된 이래 가장 길다는 열흘 연휴(9월 30일~10월 9일)가 시작된다. 양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4일) 연휴에 국경일(3일 개천절, 9일 한글날)과 주말·대체휴일이 이어지는 가운데 틈이 생긴 하루(2일)를 정부가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그렇게 됐다. 부지런하게 준비한 사람들은 알찬 휴가를 즐기겠지만, 주머니 썰렁하고 정신·시간에 여가가 없는 대부분의 서민은 뭐하며 지낼지 막연할 터이다. 나들이 차량이 몰려나오면 교통 사정도 어려워져 무턱대고 길을 나서기도 쉽지 않다. 한가한 날 하루쯤 저녁 시간을 맡겨도 좋을 만한, 격조 있는 술집이 있어 명절 맞이로 소개한다. 추석 이틀 뒤에 뜨는 달이 진짜 보름달이라고 하니 그날을 노려봄직도 하겠다.
‘10월의 메뉴’로 준비한 능이갈비찜이 처음 상에 나왔을 때 모습.
주점 안주라고 대충했을 걸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능이갈비찜에는 굵직한 한우 갈빗살 여러 점이 들어있다.
10월의 메뉴 능이갈비찜·한우수육·대하장 ‘한식 주점 얼쑤(서울 마포구 어울마당로 136-3 2층/전화 02-333-8897)’는 지하철 홍대입구역 8번 출구에서 서교초등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다. 식사를 대신할 만한 푸짐하고 고급스러운 안주와 50종의 전통주를 구비한 프리미엄 주막이다. 안주가 20여 가지인데 중심품목이 매달 조금씩 바뀐다. ‘10월의 메뉴’는 ▷익은 얼갈이배추를 접시 바닥에 깔고 국물 자작하게 내오는 한우사태수육(3만5000원) ▷능이가 넉넉히 들어간 능이한우갈비찜(4만원) ▷맛간장이 적당하게 밴 큰 새우가 10마리 올라가는 대하장+간장계란밥(2만5000원) 3가지다. 고정으로 스테디셀러 안주는 ▷국산 암퇘지 오겹살 500g을 삶아 멸치젓(또는 갈치속젓)쌈장과 명이장아찌·오이김치·쪽파김치가 함께 나오는 보쌈(3만5000원) ▷30㎝(직경) 제철 해물야채전(2만5000원) ▷1등급 암소 채끝살 150g을 익혀 부추·고추간장과 함께 내는 한우 냉채(3만원) ▷제철 생선구이(3만원) ▷국산 암퇘지 고기 200g이 들어가는 김치찌개(2만5000원) ▷골뱅이무침(2만5000원) ▷육포·먹태·혼합견과류로 구성된 마른안주(2만5000원) 등이 있다. 술은 전국 양조장에서 공급받는 증류주 14종, 청주 14종, 탁주 22종이 있다. 일반 소주와 맥주도 판다.
‘10월의 메뉴’ 대하장+간장계란밥.
‘10월의 메뉴’ 얼갈이한우수육은 자작한 국물에 잠겨 나온다.
영업시간은 오후 6시~다음날 오전 1시(금·토요일엔 오전 2시)이고, 일요일은 쉰다. 이번 연휴에는 일요일 두 번과 10월 4~5일 쉬고 남은 엿새 동안은 정상적으로 열 예정이다.

나는 애주가이지만 ‘얼쑤’에 가면 술보다 안주에 더 관심이 간다. 갈 때마다 이달에는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맛을 냈을까 궁금하다. 안주가 일반 주점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술집 안주가 아니다. 정통 한식집 음식 못지 않게, 제대로 공부하고 좋은 재료 준비해 격식을 갖춰 만든 ‘요리’가 나온다. 단골이 된 이유다.

술보다 안주가 기대되는 프리미엄 주막 젊은 오너셰프 조성주(33)씨의 붙임성과 푸짐한 음식 인심도 사람을 끈다. 그는 요리하는 시간이 아니면 주문한 술이나 안주를 상에 내면서 이것 저것 설명한다. 술의 특성이나 안주를 맛있게 먹는 방법, 안주와 맞는 술 선택 같은 내용이다. 안주는 가격에 비해 품질 좋고 요리사 풍채처럼 양이 푸짐하다. ‘30㎝ 해물야채전’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면적만 넓은 게 아니다. 두께나 들어간 해물과 채소들이 푸짐하다. 반죽은 재료가 흩어지지 않을 만큼만 들어갔다. 두껍고 크기로 유명한 시카고식 딥 디시(deep dish) 피자가 연상된다. 그렇다고 식감이 무거운 것은 아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면서 맛은 경쾌하다. 여럿이 앉은 테이블에서는 이 안주를 빠뜨리지 않는다.
‘얼쑤’의 대표 안주인 ‘30㎝ 제철 해물야채전’. 내용물이 푸짐해 두껍고 크다. 둔중해 보여도 맛은 경쾌하다.
비나 눈이 오는 저녁엔 반사적으로 이 집이 생각난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퇴근길을 그쪽으로 잡는다. 앞 건물은 1층이고, 얼쑤는 2층에 자리잡았다. 사분합 창호처럼 넓은 창을 열면 거리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비올 때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 내릴 때는 날리는 눈발의 자취를 좇으며 창가에 앉아 맛있는 안주에 좋은 술을 마시는 걸 상상해 보시라. 눈비가 오지 않아도 창 밖으로 펼쳐지는 야경이 안주 한 접시 구실은 한다.
2층에 자리잡은 ‘한식 주점 얼쑤’의 앞 건물은 1층이다. 창 밖으로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도시 야경을 즐기기 좋다.
지난 23일 오후 6시 45분의 ‘얼쑤’ 매장. 토요일 초저녁이어서 손님이 많지 않다.
이곳에서는 한식과 전통주 관련 행사나 이벤트도 자주 열린다. 우선 ‘한식 맛있는 상상(대표 권용국 서가네순대국 사장·이하 한맛상)’ 모임이 매달 열린다. 현업 한식 조리사들이 어울려 공부도 하고 교분도 쌓고 음식과 술도 나누는 모임이다. 이달에는 제23회 모임이 ‘법고창신(法古創新) 두 번째 이야기-한식의 아름다움과 가치의 재발견’을 주제로 지난 17일 오후 9시 30분부터 3시간 넘게 진행됐다.
젊은 한식조리사들 공부모임·이벤트도 지난 11일에는 서울시내 유명 한식 주점 3곳의 연대 기획 ‘버뮤다 삼각지대 품앗이 프로젝트’라는 이벤트가 열렸다. ‘얼쑤’와 ‘담은(서울 서초구 신반포로 189 반포쇼핑타운 4동 지하/전화 02-536-7500)’ ‘두두(서울 종로구 동숭2길 3-4/전화 010-9119-1884)’를 운영하는 젊은 셰프 셋이 모여 각자의 대표메뉴 고추장대하·묵덕강된장·명란구이에 계절쌈·덮밥을 더해 한 상에 차려 내는 행사다. 값도 놀랍게 싼 2만9900원이다. 삼각지대는 홍대앞-반포-대학로를 연결했다는 뜻이다. 행사는 10월 5일 ‘담은’, 11월 12일 ‘두두’로 이어진다. 이문도 박할 텐데 왜 행사를 하는지 물어봤다. 홍보는 덤이고 교류와 상호 검증, 아이디어 교환이 목적이라고 했다. 자신의 음식이 정체됐다는 느낌이 들 때 변화의 모멘텀을 충전하기 위해 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한식 주점 3개 업소의 품앗이 프로젝트에 나온 ‘얼쑤’의 고추장대하와 ‘두두’의 명란구이.
한식 주점 3개 업소의 품앗이 프로젝트에 나온 ‘담은’의 묵덕강된장+비빔용 밥과 계절 쌈.
얼쑤·담은·두두 한식 주점 3개 업소의 품앗이 프로젝트에 나온 표고·애호박을 곁들인 금태구이.
얼쑤·담은·두두 한식 주점 3개 업소 품앗이 프로젝트의 한 상 값은 놀랍게 싼 2만9900원이었다.
지난 8월 30일에는 ‘배혜정도가’의 술과 ‘얼쑤’ 음식의 페어링 시음회가 있었다. 이밖에도 크리스마스 이브 한식 디너 코스와 우리 술, 봄나물 안주를 중심으로 한 ‘봄날 벚꽃 필 즈음 낮술’(일요일), 칵테일과 안주 페어링, 새로운 전통주 맛보기 같은 이벤트가 주말에 끊임없이 열린다.
‘품앗이 프로젝트’와 ‘한맛상’ 행사에 참석해 술상을 받았다. 매달 열리는 ‘한맛상’은 주제를 정해 60~90분 강의를 듣고 전통주와 코스음식을 나누는 순서로 진행된다. 회비(4만원 정도)를 받는 유료행사다. 일요일 오후 9~10시 모임을 시작한다. 현업 조리사들이 영업 마치고 모일 수 있는 시간이다. 일에 치여 공부할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벗어나 보려고 공부를 빠뜨리지 않는다. 음식은 운영진 6명을 2개 조로 나눠 격월로 준비한다. 2개월을 숙제 하듯 고민해서 차린다. 이번 달에는 ‘얼쑤’ 조 셰프가 조장인 B조에서 맡았다.
지난 17일 밤 10시 ‘얼쑤’에서 열린 ‘한식 맛있는 상상’ 제23회 모임 참석자들이 ‘한식의 법고창신’을 주제로 한 김민지 식공간 연출가의 강의를 듣고 있다. 대부분 자신의 음식점 영업을 마치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한식 법고창신 토론하고 새 음식 시식도 20명쯤 모인 이번 달의 공부 주제는 ‘한식의 법고창신’이었다. 식공간 연출가 겸 영화음식 감독 김민지(39)씨가 강의를 했다. 김 대표는 “한식의 좋은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여러 대답이 나왔다. 세계지도를 펼친 그는 한식의 장점이라고 꼽은 것들이 지구 어디에나 있음을 예시하면서 “지역·종족 별 식문화의 독창성(originality)은 없다”고 했다. 대답한 사람들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그는 “한식의 특성과 가치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 생각한다”고 논의를 정리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주창한 새로운 문장론이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조선후기사상사)는 “지나치게 옛 것을 본받는 법고(法古)에 집착하면 때묻을 염려가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신(創新)에만 경도되면 근거가 없어져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장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는 원론이라 할 수 있다”고 주석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현암사)
‘한식 맛있는 상상’ 제23회 모임 식사에 첫 시식 음식으로 나온 단호박죽.
제23회 ‘한식 맛있는 상상’ 모임의 주제인 법고창신의 취지에 맞춰 준비한 계절잡채.
등갈비를 튀기는 조성주 셰프.
제23회 ‘한식 맛있는 상상’ 모임에 준비한 한식 코스의 메인 음식 격인 등갈비튀김. 한쪽에 쌀 알갱이를 묻혀 튀기고 익힌 밤과 은행을 함께 접시에 담았다.
등갈비튀김에는 사워 크림에 게·대하 맛을 더한 딥소스가 함께 나왔다.
강의가 끝나자 조 셰프가 중심이 되어 준비한 코스음식이 나왔다. 말린 크렌베리와 건과류를 올린 단호박죽, 우엉·얼갈이·시금치·오이·당근·양파 넣고 고추기름으로 무쳐 매콤한 계절잡채, 등갈비튀김이 이어졌다. 등갈비튀김은 이날의 공부 주제인 법고창신을 염두에 둔 메뉴였다. 돼지갈비를 양념에 재웠다가 반죽 입히고 한쪽에 쌀 알갱이를 묻혀 튀기고, 익힌 밤과 은행을 섞어 접시에 담았다. 백립(back ribs)요리를 한식으로 해석했다고 했다. 소스는 사워 크림(sour cream)에 게·대하 맛을 가미하고 치즈·토마토를 넣어 만든 딥소스였다.
이북식해장국은 원래 소고기로 끓이는데 대신 새우를 넣었다. 버섯과 박속도 들어갔다.
앞접시에 덜어놓은 이북식해장국. 버섯과 자른 박속이 보인다.
가을 들깻잎을 얹어 찐 부세굴비찜. 비린내를 잡아주는 말차(抹茶)로 국물을 했다.
다음에 이북식해장국이 나왔다. 해물육수에 흰다리새우·송이(아주 조금)·표고, 2종의 느타리와 박속을 넣고 끓인 국물요리다. 원래 쓰는 소고기 대신 새우로 바꿨다. 양념장은 새우젓·고춧가루·청양고추 넣고 비벼 재웠다. 국물이 처음엔 시원한 맛이었으나 양념장을 치니 아주 칼칼해졌다. 부세굴비찜은 비린 맛을 빼기 위해 말차 육수 자작하게 붓고 가을 들깨 줄기 끝을 뚝뚝 자른 막깻잎을 얹어 쪘다.
민들레 잎이 들어간 양념간장과 무밥.
수정과를 응용한 계피 레몬 즙과 계절과일 후식.
마지막으로 무밥과 민들레장이 나왔다. 익힌 무 채에 불린 쌀을 섞어 지은 밥이다. 무밥이 물 맞추기가 어려운데 이날 밥은 질었다. 비빔간장에는 민들레 잎과 부추를 다져 넣어 향긋했다. 후식은 수정과를 응용한 오미자청과 계절과일 모둠. 계피 끓인 물에 오미자청, 라임(또는 레몬)즙을 섞은 주스를 담은 컵에 제철 과일 참외·멜론·포도·무화과를 담가 단맛·신맛·계피향이 견고하게 어우러진 시원한 맛이었다.
3년3개월 만에 탄탄히 다진 업계 기반 2014년 개업한 ‘얼쑤’는 이제 업력 3년3개월을 갓 넘겼다. 내가 출입한 건 2년이 좀 넘었다. 조 셰프 어머니와도 친할 정도니 제법 단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본 적은 없다. 기사를 핑계 삼아 23일 점심에 만났다. 그는 파김치 한 봉지를 인사 삼아 싸 들고 나왔다. 그 마음이 예뻤다. 장소 선택을 맡기니 ‘을지면옥’을 꼽았다. 둘이 식사하기는 두 번째인데 그때마다 냉면을 먹었다. 비빔냉면과 제육을 시키고 양념 더 달래서 비볐다. 먹다 보니 고기는 남고 면은 모자라 비빔사리를 추가했다. 그걸 안주로 빨간 뚜껑 소주 각 1병을 마셨다. 입가심으로 물냉면도 한 그릇씩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내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했다. 다시 ‘얼쑤’로 가서 사진 찍고 술도 마셨다. 12시간 30분 동안 동행하며 얘기를 들으니 줄거리가 잡혔다.
만날 장소 선택을 맡겼더니 ‘을지면옥’으로 정했다. 그와 함께 한 식사 두 번 모두 메뉴는 냉면이었다. 냉면에 제육을 비비는 표정이 득의만만하다.
외가가 있는 대전에서 태어났지만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기억나는 곳만 진도, 강원도 동해안, 용인, 수원, 안양 등 8~9개 지역을 돌았다. 음식으로는 진도와 동해안이 생각난다. 어머니 친정은 대전 부잣집이었다. 아버지는 충남 부여 임천면이 고향이다. 부여 사비성의 외곽이던 임천은 십여 리(4~5㎞) 앞으로 금강을 끼고 발달한 비옥한 평야지대다. 군산 앞바다 어선들이 올라와 짐을 부리던 강경포구도 마주하고 있어 물산이 넉넉하던 농촌이다.

20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수를 했으나 대학과는 인연이 없었다. 다른 기자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요. 구태여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필요하면 나중에 가면 되죠”라고 얘기했다(한겨레 서울& ‘박미향 기자가 다니는 집’ 2016년 05월 19일). 다니던 학원 일을 봐주다가 2004년 말부터 2006년 12월까지 상근예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복무기간이 28개월에서 24개월로 단축된 뒤 첫 대상이었다. 제대 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무렵 이어진 사회이슈가 유명인사들의 허위학력 문제였다. ‘조성주 선생’에 대해서도 학원에서 시비가 생겼다. 스타강사가 꿈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의 미스매치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던 때다. 새 길을 찾았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20대 마감하며 창업 2010년 한국기업 지사장으로 있는 사촌 형을 찾아 일본으로 갔다. 한·일 연결을 도와주는 일을 4개월쯤 했다. 너무 짜인 틀에서 일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노력한 만큼 몫이 돌아오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학원에서 일할 때는 보상이 그렇게 돌아왔다. 귀국해 사업을 해보려고 고민했다. 외삼촌들이 외식업을 했다. ‘장충동 왕족발’ 편의점 상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일이 외삼촌 사업 중 하나였다. 그런 사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아이템이 무엇인지 재보고 있을 때 막걸리 바람이 불었다. 술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았다. 우리나라 전래의 소주·청주는 없는지 알아봤다. 책도 드물었지만 있어도 내용이 가지각색이었다. 자료가 빈곤하다는 걸 알고 양조장을 찾아다녔다. 명인들 작업장, 약주·소주 제조장을 1년 정도 무작정 돌아다녔다. 충청·전라도 지역은 거의 다 가봤다. 어렵게 찾아가서 얘기를 들어보면 술에 관해서는 감추는 게 너무 많았고, 음식에 대해서는 전통을 따르는 것만 강조했다. 송화백일주의 경우 스님들 술이다 보니 육류가 배제된 심심한 안주를 철칙처럼 얘기했다. 술과 안주의 어울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도수 높은 증류주에는 고기나 진한 안주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술에 맞는 안주를 내가 만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요리 세계에 발을 디딘 시발점이다.

대전에서 술집을 하던 외사촌 형이 2012년 업장을 서울로 옮겼다. 거기서 일하게 됐다. 처음엔 주방을 맡으려 한 게 아니라 내 사업을 하려고 배우는 게 목적이었다. 전체를 알려면 주방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주방 일을 맡았다. 술이 궁금해 파고들다가 술과 안주의 어울림에 대한 호기심으로 중심이 이동했다. 사전교육 없이 바로 현장에 들어가 칼을 잡았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시작했다. 정해진 안주 만드는 식자재밖에 없어 해보고 싶은 음식을 해볼 수 없었다. 갑갑했다.
전복장은 속살까지 간이 잘 뱄다.
제철 생선구이로 가자미를 구웠다. 부드러운 살에 잘 익은 갓김치를 올려서 먹으니 맛이 배가됐다.
신선한 우럭을 찐 다음 어린 쑥을 얹었다. 도다리쑥국을 응용한 2~3월 계절 안주다.
회를 다루고 싶었다. 학원을 찾아가 속성과정 강의를 3일 들었다. 강의를 더 들을까 생각하다 그 돈으로 생선을 사다가 실습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익혔다. 다음엔 중식을 배우러 갔다. 중국음식을 좋아했다. 일 그만두고 학원만 다녔다. 6개월 과정인데 이론은 건너뛰고 떼를 써서 실무 2개월 수업만 받았다. 웍 쓰는 걸 좋아해 지금도 한식 조리에 자주 사용한다. 한식은 자격증 반이 대부분이어서 찾아가지 않았다. 음식 만드는 실전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2013년 말에는 ‘와인주막 차차’로 자리를 옮겼다. 와인과 한식을 표방하는 비스트로 체인이다. 음식 일을 도와주며 와인 클래스에 나가 공부를 했다.
음식과 술 공부 과정 좌충우돌·종횡무진 만 2년 동안 술과 음식 사이를 럭비공처럼 튀어 다니며 몸으로 부딪혀 익힌 다음 2014년 6월 26일 현재의 자리에 ‘한식 주점 얼쑤’를 열었다. 외아들을 끔찍이 여기는 어머니 권영심(60) 여사가 장소도 알아봐주고 초기부터 음식과 운영을 돌봐줬다. 한국 전통주를 취급한다는 원칙에 따라 취향에 맞는 술을 골랐다. 초기엔 사업자가 아닌 소비자 입장에서 술값을 책정해 터무니없이 싸게 팔았다. 주변 업장에서 덤핑한다고 무척 싫어했다.
‘얼쑤’의 술 냉장고에는 전통주 50가지(증류주·청주 각 14, 탁주 22종)가 있다. 일반 소주와 맥주도 판다.
증류주(미르40)를 위스키 디켄터에 넣고 돌리는 조성주 셰프. 10여분 돌린 후 마시자 술이 신기하게 부드러워졌다.
취급하는 술이 많다 보니 술에 대한 설명을 해줘야 했다. 어느 지역 술이고, 어떻게 빚었고, 맛은 어떻고, 어떤 특징이 있고 하는 것들을 얘기했다. 그런데 손님들이 마셔보고는 맛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마셔보면 알고 있는 것과 맛이 달랐다. 설명이 틀린 것이다. 원인을 추적해 보면 양조장에서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술을 담글 때마다 품질이 균일하게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비교적 안정됐지만 3년 전만 해도 양조장 자체가 새로 배워 생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 적지 않았다. 술 만드는 과정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에게 배우러 갔다. 1개월을 배웠다. 술에 대한 생각이 맞지 않아 그만뒀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을 찾아가 다시 배웠다. 이후에도 국순당 창업주인 고 배상면(1924~2013)회장의 수제자로 꼽히는 이윤희 박사가 운영하는 한국양조연구소와 국세청 주류교육 등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여러 수업을 들어보고 판단하려고 했다. 류인수 소장의 가양주연구소 수업 마지막 단계에서 고문헌을 공부하게 됐다. 조선시대 인문서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술·식초·장·김치 같은 발효음식이 모두 한 울타리 안의 이웃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깊은 공부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매달 100L씩 담가 술 공부…증류주 실습도 이어 수원의 식초 전문가 한영석 발효연구소 소장을 찾아갔다. 발효식초로 척수염을 고친 그는 식초의 원료가 되는 술을 연구했고, 좋은 술을 빚기 위해 누룩을 직접 디디면서 발효를 체계화하고 있다. 한 소장의 가르침은 경험을 통해 얻은 산 지식의 전수였다. 전통주가 왜 이렇게 가야 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매달 한 차례 술을 빚을 때 그곳 누룩을 쓰면서 계속 배우고 있다.
조성주 셰프가 창고 겸 양조 실습실에서 술 담글 준비를 하면서 밑술 발효상태를 살피고 있다.
2014년 박록담 선생에게 처음 술을 배울 때부터 “해봐야 안다”며 몸으로 부딪히는 공부를 했다. 직접 빚으면서 실패를 선생 삼아 배웠다. 2년 반 정도는 30L 항아리 8개를 가지고 한 달에 두 가지씩 술을 담갔다. 올해부터는 100L 스테인리스 통에 월 1회 담근다. 술(주질)이 분명하게 좋아진 것은 한영석 발효연구소 수업을 들은 이후다. 술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듯하다.
그 동안 석탄주·백화주·연엽주·오양주를 빚어봤고, 누룩 넣고 발효하는 황매실주·복분자주·아로니아주·야관문주·갈화주·허브술도 실험해봤다. 100L 통으로 술을 빚다 보니 거른 술을 6개월간 숙성해야 하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 요즘엔 증류 실습도 하고 있다. 이강주를 만들어봤다. 소주고리로 내리는 전통방식은 아니고 가정용 단식 증류기를 구입해 쓰고 있다. ‘한맛상’이 열린 날 맛보라며 이강주를 10mL쯤 잔에 따라 주는데 입에 머금으니 화하게 퍼지는 증류주 느낌이 제대로 났다. 전에는 담근 술을 손님들에게 맛보라며 내놓기도 잘 했는데 요즘은 줄었다. 담근 술을 손님들에게 맛보라고 주니까 술이 안 팔려서 이젠 조금씩 맛만 보인다고 했다.
봄나물과 전통주의 어울림을 모색하는 행사에 안주로 나온 성게알 가죽순 비빔국수.
봄나물과 전통주의 어울림을 모색하는 행사에 안주로 나온 훈제오리구이와 건옻순장아찌.
‘얼쑤’를 개업하면서 음식은 정해진 아이템만 하면 되겠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실제 해보니 하면 할수록 손대야 할 것이 많고, 안다고 생각하면 바로 아닌 게 보이고, 사방이 벽이었다. 냉동고기 썰다가 냉장고기를 제대로 썰 때까지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다. 육포를 좋아해 직접 만들어서 안주로 내고 있는데, 그걸 제대로 만들기까지 버린 고기가 말도 못하게 많다. “다시 시작하라면 못할 것 같다. 경험만한 선생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고 했다.
”한식 특징이 뭐냐” 질문 받고 새로운 눈 떠 좋아하는 일 하겠다고 시작해 4년을 몸으로 견디며 외길을 달리던 2015년 어느 날 등짝으로 죽비가 날아들었다. 식공간 연출가 김민지씨가 “한식의 특징이 뭐냐”고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답을 못했다. 충격이었다. 한식에 대해 아는 게 뭔지 근본 질문 앞에 서게 됐다.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책도 열심히 찾아보고 틈만 나면 선배 셰프들 찾아가 물었다. 특히 ‘온지음’ 수석연구원인 박성배 셰프에게 많이 의지했다. 여러 번 찾아갔다. 지금도 뭔가 신기한 게 생기면 들고 간다. 두 달에 한번 꼴은 가는 것 같다.
안주를 조리하는 동안 먹을 수 있게 내주는 간장양념연두부.
조성주 셰프가 서비스로 내준 가래떡구이와 꿀. 주방이 한가하면 손님 군것질 거리도 만들어준다.
그때 충격으로 한식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집에 장이나 김장 담글 때 어머니와 함께 하기 시작했다.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은 ‘얼쑤’에서 대부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다. 장·김치 잘 담그고, 특히 음식 간을 잡는 솜씨가 좋다. 된장 담그는 걸 설명하는데 방법이 색다르다 “장을 갈라 된장을 비빌 때 보리밥과 고추씨를 갈아 넣고 흰콩을 푹 무르게 삶아 물까지 버리지 않고 다 섞어서 치대 항아리에 담아 숙성하면 된장이 황금빛으로 익는다”고 했다. 이런 디테일을 아들이 물려받고 있다.
2년 집된장과 국산 암게로 끓인 된장꽃게탕.
국산 암퇘지고기 200g이 들어간 김치찌개.
오겹살 보쌈과 명이나물. 갈치속젓과 오이김치·파김치를 함께 차렸다.
한우숙주볶음.
2015년에는 요리연구가 고은정 선생이 지리산 견불동에서 운영하는 우리장아카데미 수업과 연말에 열린 샘표 장 발효 수업도 들었다. 올 4월부터 8월까지는 한복려 선생의 궁중음식연구원에서 한식을 공부했다. 입문부터 단계가 있는데 박성배 셰프의 추천으로 고수반에 바로 들어갔다. 7월부터는 반가음식의 권위자였던 고 강인희(1919~2001) 교수 수제자인 ‘한국의 맛 연구회’ 이말순 선생을 사사하며 매주 한 차례 반가음식을 배우고 있다. 자택에서 소수 인원만 가르치는데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 대기자로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경영실적은 본인 인건비 겨우 뽑는 수준 분위기와 음식 영향인지 손님은 40대 이상 직장인이 많다. 20~30대 젊은 층은 30% 정도다. 한식이 기조이다 보니 음식이 재료부터 신세대 취향과 거리가 있다. 조 셰프가 추구하는 음식은 모던 한식이다. “한식에 기반을 두되 구태의연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생선찜이라고 꼭 생선육수 써야 하는 건 아니다. 고기육수나 닭육수를 써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맛을 내고 싶다. 장부터 김치와 모든 양념까지 직접 준비해서 만드는 한식을 하고 싶다. 한식 전반의 전 과정을 콘트롤 할 수 있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
나주에서 공급받는 1.2㎏ 오리로 끓인 능이오리백숙. 하루 전에 예약해야 준비해 준다.
술과 음식 공부를 하러 다니느라 낮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공부하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연조에 비해 빨리 업계에서 그를 알아주고 있다. 2015년 국산와인품평회 심사위원에 위촉됐고, 우리 술 주안상대회 문배주부문 은상을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아시아 명장요리대회에서 개인전시 부문 금상을 받았다.

돈은 좀 버는지 물어봤다. 개업 1년 지나면서 손익분기점은 넘었지만 인건비 겨우 건지는 수준이다. 거의 매일 늦게까지 도와주는 부모님 인건비는 계산하지 않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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