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쇼미더머니' 분노학 / 안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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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의 히읗자도 모른다.
자막이 없으면 가사 한 소절 알아듣지 못하는 내겐 다만 속사포 같은 말과 화난 표정, 허세의 몸짓이 힙합이다.
쇠락한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공간적 배경과 빈곤층 청년 에미넴의 생애서사가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힙합의 서정은 존재론적인 '분노'일 거라고 겨우 짐작했다.
어쩌다 한국 힙합은 장르의 기표만 남고 맥락이 소거돼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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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안영춘
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힙합의 히읗자도 모른다. 자막이 없으면 가사 한 소절 알아듣지 못하는 내겐 다만 속사포 같은 말과 화난 표정, 허세의 몸짓이 힙합이다. 미국 힙합 래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8마일>(2002)을 보며, 처음엔 래퍼들이 그저 마초로만 여겨졌다. 쇠락한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공간적 배경과 빈곤층 청년 에미넴의 생애서사가 차츰 눈에 들어오면서 힙합의 서정은 존재론적인 ‘분노’일 거라고 겨우 짐작했다.
요즘 뜻하지 않게 힙합에 자주 ‘노출’된다. 리모컨권을 쥔 동거인들 탓에 깊은 밤 하릴없이 힙합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지켜본다. 여기에서도 분노와 허세는 쉽게 눈에 띈다. 그런데 <8마일>과는 자못 다르다. 출연자들은 화난 표정으로 배틀(춤이나 노래 따위를 맞겨루는 일)을 하지만, 심사를 받을 때면 다소곳하기가 흡사 교회 성가대원들이다. 피붙이의 우승(출세)을 간절히 바라는 가족 모습이 삽입된 어느 장면은 휴먼 드라마와 차이가 없다. 이쯤 되면 분노는 패션이거나 코스프레다. 어쩌다 한국 힙합은 장르의 기표만 남고 맥락이 소거돼버린 걸까.
‘시내버스 240’이 ‘은하철도 999’만큼 유명해진 데에도 분노라는 불쏘시개가 있었다. 집단분노는 버스 기사→아이 엄마→인터넷 고발자로 옮겨붙었다. 그제의 악마가 어제부터 신실한 가장이 되고, 어제의 마녀는 오늘 무구한 엄마가 되었지만, 그 아찔한 급반전에 각주 한 줄 달리지 않았다. 분노의 주체들은 말로써 뜨겁게 개입할 뿐, <쇼미더머니>의 일부 래퍼들이 그렇듯 자신의 존재를 1그램도 걸지 않았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도 변증법적 집단지성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분노의 대상만 교체하는 ‘반복’에 갇혔다. 일관된 것은 오직 분노였다.
분노해야 할 대상에 분노하는 것은 정의롭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2010)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촉구한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촛불혁명’에서 스테판 에셀의 요청을 초과 달성했는지 모르겠으나, 총량 불변의 법칙을 증명하듯 100% 충전 상태인 분노의 대기 모드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화염방사기 같다. ‘시내버스 240’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는 걸 보면, 분노는 ‘반복충동’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사건에 앞서 이미 분노가 있고, 사람들은 분노를 투사할 대상(사건)을 찾아 여기저기 배회한다.
한국 사회가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원인을 하나로 환원해 짚을 수는 없다. 만성적인 스트레스, 만연한 불공정, 양극화의 소외감…. 하지만 분노의 화살표는 특권을 누리는 강자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먹고 눌 시간도 없이 하루 12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버스 기사, 퇴근길 초만원 버스에 어린아이와 함께 탑승해야 하는 엄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침없이 화를 낼 수 있는 건 자신을 예외적인 위치에 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분노에는 존재가 담기지 않는다.
초연결사회에서 분노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지만, 익명의 힘으로 집단화하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천원 가게 ‘다이소’가 ‘탕진잼’(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을 좇는 소비자들 덕에 급성장하듯이, 우리는 분노를 값싸게 구매하고 가볍게 소비하며 ‘분노사회’를 구축해가고 있지 않은가. 촛불혁명을 일군 분노의 힘이 허세만 남은 래퍼의 그것처럼 되지 않으려면 분노는 성찰과 관리의 대상이 돼야 한다.
끝으로, 사심 가득 담긴 바람 하나. 나는 누구 못지않은 김광석 팬이다. 그가 떠나던 날, 날씨가 어땠는지까지 기억한다. ‘시내버스 240’ 사건이 재현되지 않기를….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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