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사이트보다 못하네.. 길잃은 취업박람회

김경필 기자 입력 2017. 9.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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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지자체 취업박람회 난립
단순직 뽑는 업체들로 채우거나 채용의사 없는 곳도 억지 참여
현장 구직자 열에 아홉 헛걸음

15일 서울 동작구청 강당에서 열린 '2017 서울시 찾아가는 취업박람회'. 이날 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는 1050명. 그러나 채용 면접을 본 사람은 130명(12.4%)뿐이었다. 나머지 구직자들은 '맞는 일자리가 없다'며 발길을 돌렸다. 대학 생물학과 졸업반인 이모(25)씨는 "영업직이나 사무보조원이 아니면 건물 청소원이나 조리보조원을 뽑겠다는 업체들 뿐이었다"며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보다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 본사가 있는 한 광고대행 업체 대표는 "신입 채용을 위해 참여했지만 취업 희망자가 대부분이 30대 이상이라서 단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박람회에 참여한 29개 업체 중 8곳은 아예 면접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26일 서울 강동구 성내동 강동구청 앞뜰에서 열린 ‘2017 강동 취업 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기업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전국에서 800여차례 열린 취업 박람회 중 하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개최하는 취업 박람회가 마구 열리면서 기업과 구직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취업 박람회가 속출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26일 서울 강동구청 앞뜰에서 열린 '2017 강동 취업박람회'에서도 구직자 1000여명과 40여개 업체가 알맞은 상대를 찾지 못해 헤맸다. 권순환(29)씨는 "기술영업 일자리를 찾아왔는데 홀서빙·조리보조 같은 아르바이트가 대부분"이라며 "뽑는 직종이 안내 문자와는 너무 다르다"고 말했다. 한 반도체 회사 인사담당자는 "수업 대신 견학 온 고등학생들, 실업급여 수령하려고 '구직활동을 했다'는 증빙만 해가려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부실 취업박람회 난립에 기업·구직자 모두 헛걸음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들이 주최하는 취업박람회가 난립하면서 부실 박람회가 속출하고 있다. 취업 정보 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취업박람회는 총 484차례 열렸다. 올해에도 9월 20일 현재 374건의 취업박람회가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이 중 대부분은 고용노동부·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와 각 지자체가 주최한 것이다. 하지만 취업 실적은 부진하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8월 발간한 '2016 회계연도 결산 위원회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지자체 등이 개최한 취업박람회 39건 중 취업률이 10%가 안 된 경우가 26건(66.7%)에 달했다.

취업박람회 대부분이 채용 대상이나 분야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구직자들이 몰려들어도 실제 채용으로는 연결되지 못하는 미스매치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아파트 경비원을 구하는 업체부터 그래픽 디자이너를 찾는 업체까지 온갖 업체들이 박람회에 참여하기 때문에 구직자가 현장에서 자기가 찾는 분야의 업체를 만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올해 경기도 기초자치단체 중 29개 시·군이 총 79차례의 취업박람회를 열었지만 이 중 76건이 참가 기업의 분야를 특정하지 않은 박람회였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17일 경기 군포시청에서 열린 '2017 상반기 채용박람회'에는 통신 배선, 콘서트 조명 연출, 케이크 제조, 노인 요양시설 운영 업체 등이 참가했다. 한 취업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지자체 취업박람회 한 번에 30개 안팎의 업체가 참여하는데 업종은 대부분 제각각"이라면서 "구직자가 그중에서 자기가 찾는 분야 업체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주최 측이 참가 업체 늘리기에만 골몰하면서 정작 구직자와 구인업체들에 필요한 정보 제공은 뒷전인 경우도 많다. 최근 서울 지역 지자체가 주관한 취업박람회에 참가한 한 업체 대표는 “업체명과 사업분야, 채용 계획 인원만 한 줄 써내고 나니 행사 당일까지 주최 측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며 “박람회에 주로 어떤 구직자들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채용 의사가 별로 없는 기업들이 억지로 참여하기도 한다. 한 항공업체 관계자는 “매년 취업박람회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많게는 15차례 받는다”며 “자체 채용 절차가 따로 있기 때문에 취업박람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타깃·분야 정해 ‘미스매칭’ 줄여야

전문가들은 “취업박람회의 주제를 명확히 정하고 대상 업종의 범위를 좁혀 매칭 확률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광모 전 경희대 취업스쿨 겸임교수는 “‘우리 지역 기업·구직자 다 모이라’는 식의 행사는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며 “‘관광산업’ ‘스포츠산업’ 등 참여 기업 분야를 확실히 정하고 타깃 구직자도 ‘이공계 대졸자’ ‘경력 단절 여성’ 등으로 좁혀야 실제 채용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해부터 ‘콘텐츠 미니 잡페어’라는 취업박람회를 열고 있다. 미디어·콘텐츠 분야 업체만 참가시키고, 참가 희망 업체들로부터 채용하려는 인력의 업무와 자격 요건, 연봉, 구직자의 작품집 준비 여부 등 세부 사항을 받아 2개월 전부터 홈페이지에 공고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난해 2차례 열린 취업박람회에서는 참가 구직자 212명 중 60명(28.3%)이 취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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