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왜 서로 총구를 겨눠야했을까?
중앙군은 일본군과, 지방군은 청군과 연합해서 서로 교전
줏대없고 전략없는 지도자의 '박쥐외교'가 만든 참극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보통 한국의 식민지화에 단초가 됐다는 전쟁으로 평가받는 청일전쟁. 이 전쟁과 관련해 국사교과서를 보다보면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동학군을 토벌했다는 조선의 '관군'은 대체 뭘했는지 여부다. 외국군이 진주해 자기네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면 분명 이를 막든, 누군가와 연합해서 싸우든 교전내용이 나와야 정상이지만 조선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사책에서 당최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조선군은 대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가지가 아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장위영(壯衛營) 군대는 일본군과 연합해 청군과 싸웠고, 당시 평양감사가 이끌던 평양의 지방주둔군인 위수병(偉戌兵)들은 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다. 전라도 지역의 지방군들은 동학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친다며 북상했고 이들을 공격한 것은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 관군이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조선군은 조선군끼리 총구를 겨누고 전투를 벌였다.
이런 한심하기 짝이없는 행태가 나왔던 이유는 당시 국왕 고종과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명성황후, 그리고 집권 민씨 척족이 최악의 외교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보통 청일전쟁이라 하면 단순히 일제의 야욕이 발단이 된 것처럼 알려져있지만, 실제 발단이 된 것은 국왕 고종의 잘못된 '파병요청'이었다.
1894년 2월, 동학 농민군이 봉기해 북상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토벌군도 패퇴하기 시작하자 다급하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코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에 의거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일본도 파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조선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 가문의 발호지인 전주가 동학군에 함락된 이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며, 결국 왕명에 따라 청나라에 파병이 요청됐다. 청군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알렸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경복궁을 불시에 습격해 점령,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뒤 조선에 내정개혁안 5개조와 함께 친일내각을 세워버렸다.
경복궁 함락 과정도 기막혔다. 원래 일본군은 당시 조선군의 무장상태에 상당히 긴장한 상황이었고 경복궁 습격 날 동원된 병력도 1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도성 밖에 병사들이 일본군의 대궐 침범소식에 입성해 교전을 펼쳤으며 당시 신무기였던 기관총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상당히 선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자 고종은 조선군에 무기를 버리라고 명을 내렸고, 이에따라 조선군은 교전을 멈추고 일본군에 항복했다.
이렇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고종과 민씨 정권의 이후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중앙군은 일본군과 함께 연합해 청군과 싸우도록 명을 내리고 지방군에는 또한 밀명을 내려 청군과 연합해 한양으로 진격, 궁궐에서 일본군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조선군은 단합해서 외세를 물리치지 못하고 최고지도자의 어리석은 결정에 따라 외세에 철저히 이용되고 만 것이다.
청나라 군대도 일본군보다 무장력이 훨씬 우수했고 보급도 탄탄한 편이었지만 군대 기강이 엉망이었고, 병사들 대부분이 도적출신이라 정규전에 익숙치 못했다. 결국 평양에 주둔하던 청군 1만3000여명과 조선군은 비슷한 숫자의 일본군을 만나 하루만에 대패한다. 당시 일본군은 탄약부족과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만약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이 하루만 더 평양성을 사수했다면 알아서 자멸할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결국 군대 기강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이러한 청일전쟁의 경과에도 고종과 조선조정은 착실한 내정개혁과 국력양성보다는 또다른 박쥐외교를 통해 이이제이만을 노린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접근, 친러정책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제거당한다. 이에 고종은 다시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내각을 박살내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을 숙청한다.
결국 식민지화로 가는 망국의 길목에서, 일제의 야욕 못지 않게 국왕인 고종과 민씨 척족들의 정치, 외교적 행태는 크게 한몫했던 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이 보여줬던 최악의 정치, 외교적 행보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6살부터 성적 흥분상태" 20대 여성이 앓은 희소병의 정체는? - 아시아경제
- 친구 때린 아들 '운동장 뺑뺑이' 시킨 아버지…훈육 vs 학대 '설전' - 아시아경제
- 사람없다고 남녀 3명이 영화관서 다리를 쭉 '민폐 논란' - 아시아경제
- 대법, “나무가 태양광 패널 가려” 이웃집 노인 살해 40대 징역 23년 확정 - 아시아경제
- 아이유·임영웅 손잡고 '훨훨'…뉴진스 악재에 '떨떠름'[1mm금융톡] - 아시아경제
- 30대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 만취 상태 음주운전…"대리기사 부르려고" - 아시아경제
- 김포시청 공무원 또 숨져…경찰 사망경위 조사 - 아시아경제
- 민희진 "주술로 BTS 군대 보낸다?…그럼 전 국민이 할 것" - 아시아경제
- 손흥민 父 손웅정 "아들에 용돈 받는다?…자식 돈에 왜 숟가락 얹나" - 아시아경제
- 소녀시대 효연, 에이핑크 윤보미 등 발리서 '무허가 촬영'에 현지 억류 -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