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림을 팔고 싶다' ..원로 화백의 소원

이상기 2017. 9. 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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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20] 소명(召命)

[오마이뉴스 이상기 기자]

 아름답고 고상한 누드화
ⓒ 문은희
[기사 수정 : 2018년 1월 2일 오후 2시 16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누드화 걸기를 꺼리는가? 전시장에도 가정에도 그리고 미술관에도 그렇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도덕적으로 풍기문란이라 그런가? '19금'이라는 규정 때문일까?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기 때문일까? 누드를 예술로 보지 않고 실물로 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상병의 표현처럼 미녀, 나부, 여인으로 변해가는 그림에 손뼉을 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 전시기획을 하는 큐레이터, 화랑을 경영하는 화상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누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화가에게 1차 책임이 있다. 대상에 대한 관찰 능력, 대상의 특징을 잡아 짧은 시간 안에 그려내는 스케치 능력, 면을 완성하고 채색을 통해 그림을 완성하는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벗은 몸이 화가를 통해 고상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드화가 외면을 받는 것이다.

 나무화랑 전시
ⓒ 이상기
누드를 통해 표현된 예술성을 관람객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다.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큐레이터다. 전시기획을 통해 누드화에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힘이다.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토리텔링을 통해 예술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전시회의 재미를 만들어내고 그 가치를 알려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찾도록 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능력이다.

화상은 예술을 다르게 해석하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화가에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현재보다는 미래가치를 보고 투자하라는 얘기다. 서양에서는 보편화된 누드화가 동양에서는 아직도 눈칫밥을 먹고 있는 게 안타깝다. 누드화가 왜 아직도 음지에서 머물고 있는 건가. 아틀리에에서 전시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화상들이 앞장섰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드화가 제대로 평가되도록 해 보자. 저평가된 그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그것도 화상들이 할 일이다.  

그림을 잘 보관하고 싶다

 화암화실 2층
ⓒ 이상기
문 화백의 화암화실은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이 생활공간이라면 2층은 예술공간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대부분은 2층에 있다. 문화백의 그림은 화선지에 그려져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림을 또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보관에 큰 어려움은 없다. 표구나 병풍 그리고 유리 틀에 넣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랍에 넣어 보관한다. 그런데 2층이 외부 공기와 직접 닿기 때문에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경향이 있다. 심한 온도 차가 그림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화선지에 곰팡이가 필 수 있다. 채색화의 경우 색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일부 작품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2층에는 냉난방 시설이 없어 일정하게 온도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또 작품이 모두 종이로 되어 있어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불이 나면 평생의 예술작품이 한순간 날아갈 수도 있다. 난로와 주방기구에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고 있어 위험은 늘 상존한다. 도난방지를 위해 경비시스템을 도입하고, 문 화백과 큰아들 문연씨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화암화실 1층에서의 문 화백
ⓒ 이상기
문 화백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데서 그림을 보관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충주에는 아직까지 시립미술관이 없다. 그 때문에 충주에서는 충주박물관이나 충주도서관 같은 데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문화유산과 도서만 취급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화가들은 이래저래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해야 할 이들이 보관, 전시, 판매에 사교까지 해야 하니, 화가로 살아가기 정말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그림을 팔고 싶다

 1987년 문 화백의 모습
ⓒ 문은희
문은희 화백은 그동안 그림을 별로 팔지 않았다. 작품을 팔지 않고 평생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화가로서는 행운이다. 그러나 작품을 팔지 못할 경우 화가들은 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문 화백도 작품을 팔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너무 자주 있었다. 수묵 누드를 그리려면 모델이 필요하고 화선지가 필요하고, 전시를 하려면 표구와 액자가 필요하다. 1988년 5월 12일 일기가 이러한 어려움을 보여준다.

"오늘도 막막한 출발이었다. 마음과 몸을 달래며 화실에 누워 있었다. 뜻하지 않게 교감 선생님이 오시고 강석원씨가 왔다. 힘찬 누드 작품을 50만 원 주고 사주는 바람에 내일은 액자 외상값을 갚고 화선지를 살 수 있게 됐다. 외상값을 갚을 생각을 하니 하늘을 날 것 같이 마음이 가벼워진다. 오늘도 또 하늘이 날 지켜주셨다."

 늘 힘이 되어준 김기창 선생
ⓒ 문은희
5월 16일 일기는 희망의 일단을 보여준다. 김기창 선생과 남관 선생의 관심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수묵 누드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가의 삶이란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보통사람들보다 기복이 심한 경우가 많다. 예술성과 예술혼은 이처럼 다른 사람이 알아줄 때 불타게 되어 있나 보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야만 몸도 회복되는 것 같다.  

"오늘 크로키 전반은 매우 힘들었다. 몸이 아직 회복이 안 되어 불편한 탓도 있었지만, 이것을 극복할 정열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2시간을 기다시피 그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붓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감에 한계가 오듯이 누드 크로키에 한계가 온다면, 나는 살아도 죽은 목숨일 거다. 붓(水墨) 누드에 도전한다는 것은 기적을 구하는 힘든 일이다. 그렇게 그렸건만 좋은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더 늙기 전에 좋은 작품을 그려야 하는데 기운이 달릴까 걱정이 된다. 강석원씨로부터 내 그림이 인기라는 전화가 왔다. 용기를 얻었다.

김기창 선생님은 나의 크로키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 남관 선생님께서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예화랑에 말씀해 주셨고, 로이드 신에게도 말씀해 주시기로 했다. 김기창 선생님께서는 뉴욕전 이야기도 해주셨다. 두 분 다 관심은 고마우나 내 사정은 전혀 모르시는 것 같다. 그러나 대가 두 분께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문 화백의 최근작 누드 콜라주
ⓒ 이상기
요즘도 문 화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둘째 아들 태연의 치료비로 들어간 돈 때문이다. 그래서 누드 작품을 팔려고 한다. 일본에서 호평을 받은 4폭짜리 병풍도 내놓았다. 일본에서 팔라고 해도 팔지 않고 가지고 온 작품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했다. 살아생전 작품을 팔아 여유 있게 사는 것은 화가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가 보다.

네덜란드처럼 국가가 화가로부터 그림을 구입해 보관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면 좋겠다. 화가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국가에서는 동시대 예술품들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후학들도 화가의 작품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화백도 일본에서의 전시회 성공 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구입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어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그림을 영원히 보전하고 싶다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
ⓒ 이상기
그림을 영원히 보전하기 위해서는 개인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 이천에 있는 월전 미술관과 청주에 있는 운보미술관이 대표적인 예다. 장우성의 작품을 전시한 월전미술관은 시립이고, 김기창의 작품을 전시한 운보미술관은 사립이다. 운보미술관이 월전미술관보다 먼저 생겼으나, 현재는 월전미술관이 훨씬 더 잘 운영되고 있다. 그것은 월전의 작품이 이천시에 기증되었고, 월전의 자식들은 운영에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운보미술관은 아들에게 상속되었고, 운영부실로 사업가에게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운보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것은 인수자가 예술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운보미술관이 조만간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운보미술관은 현재 기획과 전시, 관리와 운영, 방문객수 등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 화백은 이 두 가지 경우를 보고 충주시에서 자신의 미술관을 지어 운영해 주길 바란다.

 시립미술관으로 바뀔 예정인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건물
ⓒ 이상기
충주시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어진 조선식산은행 건물이 등록문화재(제683호)로 지정됨에 따라, 이곳을 리모델링해 시립미술관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은희 화백의 작품을 중심으로 시립미술관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전시실을 셋으로 나눠, 스케치, 감, 누드 세 가지 장르를 전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시 당국의 결심과 지역 화가들의 수용이다. 대구시에서 이우환 미술관을 지으려다 지역 예술인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문 화백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미술관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남은 평생 노력할 것이다. 미술관을 세우는 일, 그것이 문 화백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마지막 염원이다. 그러나 때와 사람을 만나야 그 일이 가능하다. 문 화백은 그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예술이라는 큰 짐을 지고 온 지난 세월이 무겁기만 하다. 그 짐을 문은희 미술관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는 없는 걸까?
알립니다
당초 기사 본문에서 "운보의 집을 컨벤션 센터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 당국과 주인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한다"라고 밝혔으나, 운보미술관 측에서 "컨벤션 센터 건립 계획이 없다"고 알려와 일부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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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연재는 문 화백이 남긴 일기, 구술채록, 방송 자료 등을 토대로 21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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