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은 다 채우지 않는다'.. 3인치 목판에 새긴 2300명의 '인생 문장'

김윤덕 기자 2017. 9. 2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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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백남준' 설치미술가 강익중, 아르코미술관서 '내가 아는 것'展
"시민들과 3개월간 함께 만들었죠"

강익중(57)의 장모(丈母)는 괴짜였다. 결혼식을 막 끝낸 사위를 앉혀놓고 다짜고짜 물었다. "자네, 아는 게 뭔가?" 가난한 예술가에게 딸을 준 불안감의 발로였으나, 강익중은 솔직히 답했다. "아는 게 없습니다."

이 사소한 대화는, 지금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설치미술가 강익중 뇌리에 깊이 박혔다. '내가 아는 것'이란 화두를 30년 넘게 붙들고 있는 이유다. "내가 아는 게 뭘까 곰곰 생각해봤죠. 처음 떠오른 게 어릴 적 이태원 가난한 비탈동네에 살던 기억이었어요. 비바람이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 색깔!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가 내가 아는 것 1호가 됐지요(웃음)." 그후 시처럼, 일기처럼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앎의 문장'들은 강익중표 '3×3인치' 타일에 새겨져 2010 상하이 엑스포에 전시됐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는 강익중에게“백남준 선생이 살아 있다면 대견해하셨겠다”고 하자 그가 답했다.“ 백 선생이 늘 자기는 2.5류라고 했어요. 저는 4.5류도 안 되지요(웃음).” /장련성 객원기자

이번엔 내가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는" 앎의 문장들을 빌려왔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11월 19일까지 열리는 '강익중, 내가 아는 것' 전시는 2300여명 시민들이 보내온 '인생 문장' 수만 개를 재료 삼아 미술관 벽면을 장식한 설치전이다. 이영주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는 "일상의 소소한 깨달음을 한 문장으로 써서 크레파스로 색칠해서 보내주면 작가가 이것을 3×3인치 나무판에 옮긴 뒤 미술관 벽에 붙이는 식으로 3개월간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방처럼" 동그랗게 세운 벽면엔 코흘리개 아이부터 90대 노인이 쓴 '인생 문장'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다섯 살 아이는 '얼음과자 맛있다고 한 개 두 개 먹다 보면 배가 아프다'고 썼고, 97세 노인은 '내 장수의 비결은 정직성에 있다'고 썼다. 한 식당 주인은 '콩나물무침은 참기름 맛이다'고 썼고, 영화배우 이선균은 '술과 부인에게는 덤비지 말라'고 적었다.

강익중은 얼마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보내온 글귀가 가슴을 울렸다고 했다. '한 가지 고마운 일, 눈물엔 색깔이 없다.' 중국 친구 빙리가 쓴 '잔은 다 채우지 않는다'는 강익중 자신의 철학이기도 했다. "잔을 40%만 채울 때 취하지 않고 맛있게 마실 수 있듯이, 우리 인생도 40%만 채우고 나머지 60%는 자연과 순리에 맡기면 훨씬 행복해지지요."

일반인들이 보낸 '앎의 문장'들로 채워진 벽면. /김윤덕 기자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받은 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강익중이 공공미술에 전념하게 된 건 뉴욕 유학 시절 만난 김향안(화가 김환기의 부인)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너 자신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 세계에 옳은지 생각하라고 하셨죠. 아이들이 꿈꿀 수 있게, 사람들이 바람처럼 땅처럼 섞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을 저는 좋아합니다."

파주 통일동산에 제작한 '10만의 꿈'(1999년), 유엔본부에 설치한 '놀라운 세상'(2001년), 146개국 어린이의 그림 12만6000점을 모아 일산 호수공원에 세운 '꿈의 달'(2004년), 순천 국제정원박람회장에 영구 전시 중인 '꿈의 다리'(2013년) 등이 그것. 작년 9월엔 실향민이 그린 그림 500장으로 런던 템스강에 '떠도는 꿈'을 설치한 강익중은 "이 작업을 발전시켜 19년째 꿈만 꾸고 있는 임진강 '꿈의 다리' 프로젝트를 꼭 성사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동그란 다리처럼 생긴 미술관이에요. 안쪽엔 실향민들 그림을 붙이고, 외벽엔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그린 어머니 그림들을 붙이려고요. 그 다리를 남북한 군인들이 총 대신 삽을 들고 함께 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건 결국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02)760-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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