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했던 율곡, 남명 조식을 혹평하다

배한철 2017. 9. 2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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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26] 안동 출신의 퇴계 이황(1501∼1570)이 경상좌도 성리학의 스승이라면, 합천에서 태어난 남명 조식(1501~1572)은 경상우도 성리학의 선구자이다. 조식의 문하에서 정구, 김우옹, 정인홍, 정탁, 최영경, 곽재우 등 당대를 풍미한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명성에 반기를 든 인물이 있다. 바로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율곡 이이다. 이이는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지만 학문을 하면서 실제로 체득한 주장과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은 없다"고 혹평했다. 이어 "이러한 이유로 그가 세상에 나와서 벼슬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잘 다스렸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며 "정구, 정인홍, 김우옹 등의 문인들이 그를 추앙해 도학 군자라고 하지만 이는 진실로 지나친 말"이라고 비판했다.

이이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는 사상적 경쟁자인 조식을 과대평가됐다고 거침없이 깎아내렸다. 책에는 명종 20년(1565)부터 선조 14년(1581)까지 조정의 시정을 담고 있다. 임금에게 경서 등을 강연한 내용과 함께 당시의 인물, 주요 사건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각 사안별로 율곡의 견해가 매우 상세히 드러난다.

이이는 조식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명유들을 거침없이 비평한다. 주리론의 대가인 회재 이언적도 피해갈 수 없다. 이이는 "(이언적은) 박학하며 글을 잘했고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 쓸 말이 없었다. 저술을 많이 하였으며 깊이 정미(精微)한 경지에까지 나아갔다"면서도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는 데는 큰 재질이 없었고 벼슬에 올라서도 절개가 없었다. 을사사화(명종 즉위년인 1545년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의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때 신문을 맡아 올바른 사람들을 추국해 공신이 됐다. 곽순이 신문당할 때 언적을 쳐다보고 '우리가 언적의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라고 한탄했다"고 했다.

이이는 "언적은 옛 전적을 많이 읽고 저술을 잘했을 뿐, 가정에서는 부정한 여색을 멀리하지 못했고 조정에 나와서는 도를 행하지 못했다"면서 "그의 두드러짐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닐지라도 그를 어찌 도학자로서 추천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말과 글이 과격했던 율곡이이도 존경했던 퇴계 이황의 친필 시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이는 거의 드물게도 최고의 지성인 이황은 존경했다. 그렇더라도 비판의 칼날은 이황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1569년(선조2) 3월 이황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임금이 그를 불러 "조정의 선비 중 누가 믿을 만하냐"고 물었다. 이황은 "이준경은 대사를 맡길 수 있으니 신임하고 의심치 마시라"고 당부하면서 "그러나 기대승은 학문하는 선비이지만 아직 심오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고했다. 이이는 이에 대해 "이준경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도에 인도하지 못하고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 기대승은 재주는 있었으나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지나쳐 선비들을 경시했으니 벼슬을 얻게 된다면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며 "이황 같은 현명함을 갖고도 추천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 퇴계의 실제 얼굴과는 무관한 작가(현초 이유태)의 상상화이다. 성리학의 만개하던 16세기에는 초상화 그리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두드러져 대학자들의 영정이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한국은행 소장
이이는 그러나 이듬해 12월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장문의 글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이는 이황의 성품과 도량이 온순했으며 세속의 이익과 화려함을 뜬구름처럼 여겼다고 기술했다. 경전 외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세상에 나섬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칭송했다. 이황은 당대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 이후로는 비할 사람이 없었다면서 그의 재주와 기개는 조광조에 못 미치지만, 의리를 깊이 연구해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한다고 했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남다르고 효도와 우애가 뛰어났다. 본래 욕심이 없어 명예욕이나 가무, 여색에 담담했다. 그러나 이따금 점잖지 못한 농담을 해 남들은 그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이이는 전했다.

이이는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자신 스스로도 평가했다. 이이는 선조에게 늘 쓴소리를 했다. 선조는 그런 이이를 가까이 두면서도 몹시 불편해 했다. 선조는 1575년(선조 8) 6월 노수신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해 보라"고 하자 노수신은 "이이와 허엽(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이 쓸 만할 것"이라고 답했다. 선조는 "허엽은 물정에 가장 어두운 사람이니 쓸 만하지 않다"면서 "이이는 가히 크게 쓸 수 있지만 말과 글이 매우 과격하다. 이는 나이가 아직 적은 까닭일 것"이라고 했다. 선조는 허엽 대신 이이를 높은 벼슬에 앉혔다.

1573년(선조 6) 8월 성균관과 사학(四學·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서부, 남부, 중부에 설치된 향교)의 유생들이 상소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현을 문묘에 올리기를 청했다. 선조는 오랜 공론이 필요하다며 이를 거부한다. 이이는 고려시대 배향한 정몽주, 설총, 최치원, 안향 중 정몽주를 제외한 3인은 도덕과 무관한 인물들이니 문묘에 올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기풍과 뜻이 미약해 잘 드러나지 못했고 이언적은 근거가 불분명하며 역시 불가를 주장했다. 조광조는 도학을 주창했으며 이황도 의리에 몰입해 일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사람을 내세워 모신다고 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라며 조광조, 이황만이 배향이 가능한 인물이라고 제안한다.

선조의 친필 병풍. 당나라 오언, 칠언시를 썼다. 선조는 명필로 유명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은 선조와 역대 왕들의 일거수일투족도 가감 없이 전한다. 선조는 학문을 즐겨 학식이 웬만한 학자들보다 높았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외모가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했다. 명종도 하성군(선조의 왕자시절)을 볼 때마다 "덕흥(선조의 친부, 명종의 이복형)은 복이 있도다"라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조는 도학군주를 자처하면서 경연에 나오기를 즐겼다. 경연에서 질문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강관들도 강의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순은 시강하고 나오면서 "임금은 정말 영명한 군주이다"라며 놀라워했다.

국상 중에는 임금도 육식을 멀리했다. 아예 스스로 육식 자체를 금지해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많았다. 단명한 인종은 채식을 지나치게 고집해 피부로 뼈가 드러날 만큼 야위어졌다. 중국 사신이 왕의 몰골을 보고 육식을 해야 한다고 권할 정도였다. 주색을 즐겼던 성종은 중도에 채식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채소만 먹으니 점점 지쳐가는 구나. 채식이 과연 어려운 일이구나"라며 "나는 고기를 먹겠다. 다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장례에 정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평소에도 육식을 즐기지 않았던 선조는 1575년(선조 8) 1월 인순왕후(명종비), 1577년(선조 9) 11월 인성왕후(인종비)가 연이어 사망하자 아예 고기반찬을 끊었다. 신하들이 간청할 때만 고기를 먹는 시늉을 하고 채소만 입에 댔다.

선조는 이해 못할 성향도 보였다. 경국대전은 경복궁에서 1000척(300m, 1척=0.3m)까지는 민가를 못 짓도록 금지했다. 그러나 역대 이래 이를 금지하지 않아 경복궁의 지척에 민가가 즐비했으며 심지어 100년이 넘은 고가들도 많았다. 선조가 어느날 이를 보고 크게 노하여 100척(30m) 내의 집을 당장 허물라고 명했다. 많은 신하들이 이로 인해 도성 내 민심이 흉흉해지고 때마침 명나라 사신이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백성들의 동요가 바람직하지 않으니 다른 해를 골라 시행할 것을 주청했다. 대간들도 번갈아 글을 올려 중지할 것을 청했다. 임금은 더욱 노해 당장 모두 헐라고 재촉하니 백성 중에 울부짖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이이는 안타까워 했다.

여색을 밝히는 선조 성향도 언급된다. 1574년 3월 임금이 의영고(義盈庫·궁중에서 쓰이는 기름, 꿀, 과일 등의 물품을 관리하던 관청)에 있는 황랍(黃蠟·밀납) 500근(300㎏)과 수은을 대궐 안으로 들이라 명한 것을 두고 논란이 됐다. 선조가 후궁에게 불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황랍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궐내에 파다했다. 선조는 불교를 멀리했다. 선조는 이 즈음 귀인 김씨를 여러 후궁 중 가장 총애했다. 귀인 김씨는 후일 인빈 김씨에 책봉되며 의안군, 신성군, 정안군, 의창군 등 4남7녀의 많은 자녀를 둔다. 이들 중 정안군은 인조의 생부이다. 이런 귀인 김씨는 아들을 위해 불상을 만들겠다고 선조를 졸랐던 것이다. 여기서 아들은 선조가 총애한 의안군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사망한 왕자인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선조는 자꾸 반대하면 국문을 열겠다고 협박했지만 거듭되는 반대에 결국 황랍을 도로 돌려보내면서 사건도 수습됐다.

1574년(선조 7) 2월 임금이 지나친 방사로 잔병치레가 잦았다. 뭇 신하들이 "여색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임금은 들은 체 만 체 했다. 선조는 오히려 "마음을 닦고 기운을 길러 장수를 하는 것이 왕도라고 할 수만은 없다. 목숨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오히려 신하들을 타일렀다. 이이는 "털끝만치라도 스스로 몸을 해롭게 하면 이것은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자(중국의 학자)가 생을 잊고 욕을 따르는 것을 심한 수치로 안다고 했는데 이 말을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1580년(선조 13)에는 하원군(선조의 맡형)이 역관의 딸 중 예쁜 사람이 있다고 천거했다. 그러자 임금은 그녀를 궁중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이는 "이때부터 (임금이 역관의 딸에 빠져) 햇빛이 광채가 없는 것이 여러 날이었다"고 했다.

임금들이 위급할 때 희한한 약을 응급용으로 처방하기도 했다. 1567년(명종 22) 6월 27일 임금이 갑자기 병환이 위중해 인사불성이 됐다. 명종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심열(心熱)증이라는 고질병을 앓았다. 심장에 뜨거운 기운이 뭉쳐 가슴이 답답하고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않는 병이다. 의관이 야건수(野乾水)를 쓰고 싶다고 하자 좌의정 이명이 "어찌 다른 약이 없어 이 더러운 약을 쓰겠느냐"고 질책했다. 그러나 영의정 이준경은 "질병에 약을 쓰는데 어찌 위아래가 있겠는가. 병증세에 따라 쓰면 될 일이다"며 야건수를 속히 쓸 것을 재촉했다. 야건수는 명종의 친부인 중종도 해열제로 복용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야건수는 야인건수(野人乾水)로도 불리며 인분을 물에 섞은 것이다. 동의보감은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고 처방한다.

시중의 세태도 소개된다. 군정의 폐단은 이미 선조 때부터 비일비재했다. 관리들이 군적을 등록하면서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까지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비는 물론 닭, 개까지 포함시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이는 "8도 감사들에게 명령하여 군액을 고르게 배정하고 그 수효가 부족하면 문서를 비워두고 천천히 한가한 장정들을 찾아내 보충한다면 백성들의 고생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병조에 논의를 붙였다. 하지만 시행되지 않았고 백성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1578년(선조 11) 8월 임금이 출행하다가 어린이가 출행 행렬에 끼어있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군사라는 답이 올라왔다. 선조는 "엄마 품이 그리울 나이인데 어찌하여 군역을 담당하고 있는가"라며 "아이를 보고서는 심기가 불편해 밤잠을 못 잔다. 내가 불민한 사람으로 임금자리에 있게 돼 이런 일이 있게 됐으니 한탄할 일"이라고 했다. 선조는 그러면서 "내가 수천 군사를 잃을 지언정 어린아이를 복역시킬 수는 없다. 군사를 점검해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모두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어린 군졸들은 고을에 돌아간 뒤 수령이 다시 고역을 시킬까 두려워해 돌아가기를 원한 자는 없었다.

1571년(선조 4) 겨울에 경기도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백성들이 불안에 떨었다. 나라에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잡게 했다. 그런데 군사들은 호랑이를 잡기는커녕 촌마을에 주둔하면서 노략질을 해 백성들이 호랑이보다 더욱 괴로워했다고 이이는 적었다. 1577년(선조 10)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민가에서는 "독한 역신이 내려왔으니 오곡을 섞은 밥을 먹어야 예방할 수 있다"는 말이 퍼졌다. 이로 인해 잡곡을 매점매석했던 사람들이 큰 돈을 벌었다. 이와 더불어 "쇠고기를 먹고 소피를 문에 뿌려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떠돌면서 곳곳에서 소를 수도 없이 잡아댔다. 전년 흉년에 이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었다. 임금은 피해가 극심한 평안도, 황해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이(1536~1584) = 호는 율곡, 석담 등이며 어머니가 사임당 신씨이다. 9번이나 과거에서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성학집요, 기자실기, 동호문답, 격몽요결, 만언봉사 등 수많은 철학사상 및 사회개혁 저술을 집필했다. 주기론적 성리학을 집대성했으며 그의 사상은 수제자인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 권상하 등으로 이어져 조선후기 주류학풍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1682년(숙종 8) 문묘에 배향됐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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