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를 금지하라](18)금지곡·땡전뉴스·블랙리스트..억압 정권, 비판을 두려워하다

허민 | 문화연구자 2017. 9. 2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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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방송과 권력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방송전파에는 권력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한국 방송의 역사는 권력의 방송장악에 대한 굴종만이 아니라 방송 독립성과 언론 자유를 위한 시민사회와 방송인들의 투쟁 과정이기도 하다. 2017년 현재, 한국의 공영방송은 유례없는 규모의 총파업을 하고 있다. 사진은 언론노동자와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KBS·MBC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고대영 KBS 사장과 김장겸 MBC 사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일은 통상시에는 생각할 수 없으며 혁명적 권력이 있는 시기이기에 가능했다.”

언론통폐합(1980)을 주도했던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청문회 진술이다. ‘혁명적 시기’란 기존의 법질서를 정지시킨 계엄 상태를 의미한다. 언론 장악의 구상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자, 그 초법적 성격에 대한 표현이기도 했다. 언론통폐합을 추진한 그의 소신은 상당한 궤변으로 점철돼 있다. ‘난세(亂世)’에는 자유민주주의자가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적이지 않은 방법을 택할 수 있으며, 이는 5공화국 다음에 민주화가 온 것으로 증명됐다는 변론이었다. 독일 나치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연상된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5공이 나치처럼 언론을 통제했으면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따위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다. 허문도의 진술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될 수 있었던 것도 6월항쟁으로 표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 덕분이었다. 민주화의 바람이 계속되던 1988년은 방송사 노조(문화방송과 한국방송공사)가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파업 투쟁까지 벌이며 방송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5공 청문회 생중계도 방송사 노조의 이러한 저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방송전파에는 언제나 권력의 그림자가 스며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시민사회와 방송인들의 저항도 계속돼 왔다. 한국 방송의 역사는 다만 권력에 굴종해 온 것이 아니라, 나름의 독립성과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6월항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났다. 2017년 현재 한국의 공영방송은 유례가 없는 규모의 총파업을 단행하고 있다. 방송과 권력의 오랜 유착과 갈등, 그리고 반목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생긴 것이다.

■ 방송 검열의 시대 개막

1960년대에는 민간 상업방송이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적인 장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초기부터 개발주의와 반공주의를 고취할 목적으로 방송매체 활용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문화방송(MBC)을 비롯한 민간 TV방송국(3개)과 FM방송국(4개), 동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 계열의 지방방송국 등이 개국했다.

하지만 방송의 성행은 반대로 규제의 필요를 더 강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민간 상업방송이 개막하던 시기에 거의 동시적으로 방송법 제정과 윤리위원회 창설이 논의됐다. 이때 방송법은 방송의 공공성 확보를 이유로 추진됐는데, 이는 “민주국가일수록 매스 미디어가 그 대중적 설득력을 오용하여 대중을 우롱하는 폐를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방송의 공공성, 방송모법의 제정을 촉구’, 경향신문 1961·4·24). 윤리위원회 창설의 경우는 주로 ‘아동보호’와 ‘콘텐츠의 선정성 방지’를 명분으로 제기됐다. 이를테면 1961년 KBS에서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사랑과 미움의 계절>(조남사 작)과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민구 작)는 ‘노골적인 러브씬 묘사’와 ‘드라마적 상황’의 ‘불건전성’이 지탄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은 ‘삼각사각간통’을 다룬 것이고, 후작은 ‘화류계 이야기’였다. 당시엔 어린이들이 방송극의 주요 청취자였기에 규제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방송극과 윤리 문제’, 동아일보 1961·9·7).

1980년대 정치권력의 방송장악을 상징한 것은 ‘땡전뉴스’였다. 1982년 1월, 시민들이 TV로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결국 방송윤리위원회가 1962년 6월에 설립되고, 방송법은 1963년 12월에 제정됐다. 그 과정에서 민간자율기구인 방송윤리위원회는 방송법에 의해 법정위원회로 격상된다. 이 자체는 (이전과는 다른) 박정희 정권의 주요한 검열방식을 함축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민간자율기구인 윤리위원회의 심의가 관권 검열을 넘어서는 검열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상검열을 국가가 독점한 상태에서 풍속검열을 민간에 대폭 위임하는 이원적 통제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봉범, <1960년대 검열체제와 민간검열기구>, 2011). 정부와 민간의 검열 이원화 정책은 대통령 직속 합의체 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와 민간조직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분할규제 형태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방송 검열의 조치들은 방송의 대중적인 영향력을 인정하였기에 시행된 것인 만큼, 그 자체로 대중을 통제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현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방송계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4년 8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언론윤리위법안을 국회에 통과시킨다. 이 법안은 신문, 방송 등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발의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론 언론윤리심의위원회를 설치해 그곳에 실권을 주는 타율적 규제에 가까웠다. 이에 언론인들은 악법 철폐를 외치며 거세게 저항한다. 법안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관련 사설과 방송을 내보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강행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 언론인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에는 ‘언론윤리위원회 발족에 관하여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에 가담하는 언론인은 ‘사이비 언론인’으로 규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결의문’, 경향신문 1964·8·10).

그 결과 언론윤리위법은 시행이 보류된다. 그런데 이 법안으로 법적 지위가 약화되었던 방송윤리위원회가 이전과 같은 권한을 회복하게 되었다. 국가의 규제에 관한 언론계의 저항이 민간검열의 강화로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당시(1964년)에는 동아방송의 시사만평 프로그램인 <앵무새>가 반정부적인 내용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관련 방송인들이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이에 방송국에서는 시사프로그램보다 예능이나 드라마에 집중하게 됐고, 이는 방송윤리위원회의 풍속검열을 강화케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방송윤리위원회는 창립된 지 10년 동안 규정 저촉 4925건을 적발했고, 552곡의 가요를 방송금지시켰으며, 536건의 광고를 규제했다(‘방송윤리위 창립 10돌’, 동아일보 1972·6·14). 유신 이후에는 2차 방송법 개정(1973)을 통해 방송윤리위원회 조항을 복원·강화하고, 방송국 심의실에서 자체 사전 심의도 하게 해 검열을 다원화한다. 동시에 정부기관의 통제수위도 높여 이중 삼중의 검열체제를 완비했다.

1990년 방송위원회 기능 축소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방송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저지를 위해 방송사 노조원들이 제작거부 농성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방송 장악과 노조의 탄생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계엄해제 이후 예상되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언론통폐합이 필요했다. 언론통폐합은 (서두에 말한 대로) 허문도 당시 정무비서관의 주도로 진행됐다. 이때 방송계도 완전 재편된다. 동양방송과 동아방송 등은 KBS로 흡수됐고, MBC는 공영체제로 개편됐다. CBS 역시 보도기능을 상실하고 종교방송만 하는 특수 방송사로 전락했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은 세계 언론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대적인 언론장악 프로젝트였다. 5공 청문회에서 허문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통폐합의 유례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이 정책을 일본이 2차 대전 중 통신사를 통폐합한 사실로부터 착안했다고 한다(許(허)씨 “반발커 통폐합 그 정도로 그쳤다”, 동아일보 1988·10·24).

이 시기 정치권력의 방송장악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속칭) ‘땡전뉴스’였다. 알려진 대로 ‘땡전뉴스’는 9시 시보를 알림(“땡”)과 동시에 뉴스 시그널 음악이 나오고, 아나운서의 “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멘트로 뉴스가 시작된다고 해서 붙은 조롱의 표현이다. ‘땡전뉴스’를 비롯한 방송사의 보도내용은 모두 정부 정책을 과대 홍보하거나 전시하는 것이었다. ‘땡전뉴스’ 이외에도 방송사의 보도 행태를 비아냥대는 말장난(?)은 적지 않았다. 가령 전두환의 호는 ‘오늘’이고, 이순자의 호는 ‘한편’이라는 말도 있었다. 9시 뉴스의 첫머리가 항상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고, 이어 “한편 이순자 여사는…” 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80년대를 되돌아 본다, 말말말’, 한겨레 1989·12·17).

언론통폐합을 주도한 허문도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1988년 5공 청문회에 나와 이마의 땀을 닦고 있다.

그러나 1987년의 6월항쟁은 세상을 바꾸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한국 방송의 민주화도 촉진했다. 6월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관련 보도에서의 극심한 편파성으로 인해 방송 민주화의 요구가 내부에서 분출했고, 새로운 방송법이 제정되는가 하면, CBS의 보도 및 광고 기능이 부활했다. 그 과정에서 1988년 상반기 동안 MBC와 KBS의 노조가 결성되었다. 방송사 노조의 탄생은 방송민주화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양 노조는 1988년 8월17일자 동아일보 1면에 ‘방송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라는 글을 게재한다. 여기서는 지난날의 편파·왜곡 방송을 반성하며 총 5가지의 결의안을 발표한다. ①노조의 단체교섭 확보 ②편성·보도 및 제작 관련 책임자 추천제 실시 ③사측의 단체교섭 임함 ④올림픽 성공을 위한 노력 ⑤방송관련법 개정이 그것이다. 결의 이후 같은 달 두 방송사 노조는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고, 그 결과로 노사 양측이 공동 운영하는 공정방송 기구를 마련하는 성과를 올렸다(‘두 방송사 노동쟁의의 성과’, 한겨레 1988·9·7).

■ 블랙리스트와 방송의 현주소

그렇다면 한국 방송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2017년 9월 현재, 한국의 공영방송은 총파업을 진행 중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방송 장악 실체가 밝혀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의 방송인 블랙리스트까지 폭로돼 충격을 주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위협은 실제 작동 여부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건을 작성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권력자들의 ‘악의’는 방송가의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인)의 위축은 그 시대에 가능한 표현의 한계를 암시하고 이는 대중에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정치를 음모론으로 소비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유희적으로 돌려 말하는 관행이 만연한 것도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또한 방송을 비롯한 주요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의심은 사실 확인(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식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인 ‘팩트주의’나 ‘실화’ 강조에는 정보를 수집하는 기성의 채널에 대한 불신도 적잖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풍조는 ‘사실만 체크하면 그만’이라는 반지성적인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을 다룬 신문기사 제목들.

블랙리스트를 비롯한 방송 장악의 효과는 이러한 파문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서 확인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부정성은 특정 방송인들의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을 추궁할 수 있다는 의지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이미 방송인 김성주씨는 동료·언론인들을 배반한 혐의로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으며, 방송인 박지윤씨 역시 KBS 예능프로 출연 후 녹화가 파업 이전이었다는 해명을 해야만 했다. 화이트리스트로 지목된 최수종씨도 마찬가지다. 방송인의 이념을 추궁하고, 그러한 추궁과 의심이 ‘정치적 올바름’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사상검증’은 다른 차원에서 언제고 반복될 것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최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KBS나 MBC를 잘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징적인 발언으로 들렸다. 과연 저 두 방송사의 대중적인 파급력이 예전과 같을까? 공중파 방송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작아졌다고 쉽게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그 성격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공중파 방송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유효한 창구가 아니라, 그저 참조의 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방송장악 시도는 그 자체로 구시대의 산물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저 낡은 권력을 뒤로하고, 우리는 방송과 권력의 관계를 사유할 ‘다른’ 방법에 천착할 때인 것 같다.

▶필자 허민
한국 근대문학·문화론을 연구한다. 주요 평론으로 <당신들은 읽지 마세요: 적이 없는 시대의 문학과 비평> <블랙리스트와 서명의 정치> 등이, 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2014), <흙흙청춘>(2016) 등이 있다.

<허민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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