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노벨상의 계절..'알쓸신잡' 히스토리

원호섭 입력 2017. 9. 24. 17:36 수정 2017. 9. 2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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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2일부터 수상자 발표..116년 다양한 에피소드 남겨
과학상 검증기간 길어져 수상까지 평균 25년 걸려
"지옥의 상인이 사망했다. 사람을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1888년 4월 13일 프랑스의 한 신문에 실린 '부음' 기사의 시작이다. 안타깝게도 노벨은 멀쩡히 살아서 이 기사를 읽고 있었다. 노벨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이 지병으로 사망했는데, 언론이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오보였다. 7년 뒤인 1895년 12월 노벨이 '정말로' 죽었을 때 그가 남긴 유언장에는 "내 재산을 성별·국적에 상관없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평화 등 분야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수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언을 토대로 1896년 노벨재단이 설립됐고 1901년부터 5개 분야에서 노벨상이 수여됐다. 그렇게, 인류 최고의 영예로 불리는 노벨상이 만들어졌다.

노벨상 시즌이 돌아왔다. 다음달 2일 생리의학상 발표를 시작으로 3일 물리학상, 4일 화학상 수상자 발표가 이어진다.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노벨상은 100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노벨상 수여가 훗날 '잘못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DDT다. 화학자 파울 뮐러는 1941년 유기염소제인 DDT를 특허출원했다. 시장에 출시된 시기는 1942년. 말라리아모기 등을 박멸한 공로를 인정받은 뮐러는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DDT가 생태계 파괴, 인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여러 국가에서 사용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8년 전두엽절제 수술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안토니우 모니스의 뇌 절제 시술 역시 부작용과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노벨상위원회는 수상 후보자의 연구 결과에 대해 오랜 기간 검증을 거치고 있다. 1970년대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업적을 내고 수상까지 평균 10여 년이 걸렸지만 2000년 이후에는 이 기간이 25년 정도로 길어졌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밥 딜런은 수상 직전까지 노벨상위원회와 연락이 닿지 않아 수상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상을 포기한 사례는 모두 11건으로 대부분 나치 독일과 소련 등 독재정권의 압박이 원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인의 노벨상을 모두 금지했는데 1938년 화학상을 받은 리하르트 쿤, 1939년 화학상 수상자인 아돌프 부테난트, 1939년 생리의학상 수상자였던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모두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옛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역시 정부의 지시로 수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노벨 과학상은 전 세계에 있는 노벨상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수상자를 선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유명 과학자도 추천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베일에 가려져 있다. 노벨상 추천위원회의 멤버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한인 과학자는 "뛰어난 업적을 낸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메일을 받는다"며 "하지만 이후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노벨상 추천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는 과학자 역시 매년 바뀐다.

노벨상은 여성 차별 논란도 자주 받았다. 핵분열을 발견한 리제 마이트너가 대표적이다. 마이트너는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핵분열의 원리를 발견했지만 194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에서 제외됐다. 중성자별 '펄서'를 발견한 여성 과학자 조셀린 벨 버넬도 수상자에서 제외되면서 여성 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랠프 스타인먼 록펠러대 교수가 선정됐다. 수상자가 발표되기 이틀 전 그가 췌장암으로 숨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노벨상위원회는 1974년 이후 사후 수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스타인먼 교수는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사후 수상자는 다그 함마르셸드 전 유엔사무총장과 작가인 에리크 칼펠트, 스타인먼 등 단 3명이다.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발표는 한 시간 동안 지연됐다. 당시 물리학상 수상은 힉스입자를 예견한 3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이후 수상 발표 지연 이유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소속 과학자들의 공로도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노벨상은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기관에 수여하지 않으며 3명을 넘지 않는 관례를 따르고 있다.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단 한 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수상자의 출생지별 분류에 한국은 '2명'으로 표시돼 있다. 198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국적의 과학자 찰스 피더슨 때문이다.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피더슨은 1904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이 담당하던 대한제국 세관에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고 전해진다. 피더슨은 8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피더슨은 '크라운 에테르'라는 유기화합물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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