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한지들, 핑크빛 공간..유럽 실력파 두 작가의 '끌림'

2017. 9. 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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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민정 '종이, 먹, 그을음'전
향불로 태운 한지로 빚은 채움·비움

설치작가 구정아도 개인전
핑크빛 드로잉·3D 애니 작품 눈길

[한겨레]

현대화랑에 나온 김민정 작가의 2008년 작 <비움 속의 충만> 연작 중 일부. 향으로 윤곽선을 태워 파낸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을 동심원 모양으로 접붙이면서 꽃밭 같은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비움과 채움의 느낌이 어우러진 명상적 분위기의 작품이다.

그을린 한지들로 뒤덮이고, 핑크빛깔로 물들었다.

서로 지척인 서울 북촌의 유명 전시장 두 곳이 이 가을 그렇게 눈을 홀리고 있다. 사간동 현대화랑 1, 2층 벽에는 둘레를 향불로 태운 한지 조각들이 겹겹이 붙여져 꽃무리, 별무리가 되어 아롱거린다. 핑크빛 색감으로 내부가 온통 발갛게 상기된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3층 공간은 색채의 황홀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레드홀’로 돌변했다.

불탄 한지들이 은은히 나붙은 현대화랑 전시는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작업 중인 김민정(55) 작가의 개인전(10월8일까지)이며, 아트선재센터의 핑크빛 공간은 이곳 2, 3층에 국내 첫 개인전(10월22일까지)을 차린 구정아(50) 작가의 출품작 중 일부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이방인 같은 실력파 여성 작가 두 사람이 사실상 처음 치르는 국내 단독 소개전시다. 한국화와 매체미술로 전공은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유럽에서 유학한 뒤 현지에서 역량을 인정받으며 중견작가로 활동 중이다. 국내 미술판에서는 생소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상당한 성가를 올리고 있는 실력파들이다.

‘종이, 먹, 그을음: 그후’란 제목이 붙은 김 작가의 전시는 향과 초로 가장자리를 태운 한지들을 집요하게 붙여나가며 자연과 명상의 이미지들을 창출한다. 여러 빛깔이 아롱진 한지를, 정신을 집중해 원하는 모양과 색감을 갖춰 일부분을 태운 뒤 연속적으로 배접시키면서 채움과 비움의 순환을 은유하거나, 한지 특유의 물성을 한껏 살린 연작들을 빚어냈다. 특히 가장자리만 살짝 태운 작은 구멍의 한지 조각을 더 큰 구멍의 한지 조각으로 덮어가면서 만든 <비움 속의 충만>(피에노 디 부오토) 연작을 눈여겨볼 만하다. 미세하게 그을린 한지 표면과, 마치 꽃밭을 떠올리게 하듯 한지 화폭에 올려진 여러 색조의 겹쳐진 화면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작가는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 한지를 잘 태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잔때 묻지 않게 풀물에 그을린 한지 조각들을 잘 개어 붙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며 작품 수행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활동을 했던 어머니의 조력 아래 수채화를 배웠고,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뒤 이탈리아에 유학해 서구 현대미술을 섭렵하며 자기만의 작업방식을 일군 작가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아트선재센터의 구정아 개인전에 처음 선보인 3D 애니메이션 <미스테리우스>. 미지의 공간을 떠다니는 외계인 같은 캐릭터가 작가의 분신 같기도 하다. 구 작가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 형상을 상상한 것이라고 했다.

구정아 개인전에서는 집과 공간에 대한 욕망을 담담하게 표현하며 서구 미술계에서 1990년대부터 주목받았던 작가의 눈썰미와 시적인 작업 흐름을 조망하게 된다. 특히 3층의 공간설치작품 <닥터 포크트>는 눈으로만 바라보는 색깔이 아니라 눈과 귀, 몸으로 혼곤하게 스며드는 색깔의 체험을 안겨준다. 바닥에 깔린 형광 분홍빛 장판이 반사되어 공간 전체를 같은 빛으로 물들인 광경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바닥 장판 위로 걸음 소리가 따각따각 속깊게 울리는 가운데 분홍빛 공간에 잠겨 벽에 내걸린 섬약한 필선의 인물, 풍경 등의 드로잉 60점을 감상하면, 몽롱한 색채에 떠밀려 어질어질해진 채로 전시장을 나서게 된다. 2층에선 처음 선보이는 3D 애니메이션 <미스테리우스>, <큐리우사>를 틀고 있다. 영상 속 미지의 공간을 떠다니며 빛을 내뿜거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리는 외계인 모양의 캐릭터는 아마도 작가의 분신일 것이다. 집 공간에 대한 애착이 유난해 90년대 말부터 서구 전시장에서 자신만의 공상이 깃든 가상 보금자리 ‘우스’(Ousss)를 이야기해온 그는 이 전시에서 애니메이션과 색에 젖은 듯한 공간을 통해 그런 집착을 난해하지만 더욱 확장된 시각언어로 새롭게 체화시켜냈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미국 디아아트센터 등 서구 유명 미술관 초대전으로 호평받았지만 국내엔 비엔날레, 단체전 말고는 나오지 않았던 작가의 내밀한 공력이 느껴진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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