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담론 살롱' 꿈꾸는 작지만 알찬 공간

입력 2017.09.24. 15:16 수정 2017.09.24. 20:36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20일 본격 개관한 서울 신촌극장

연출가 전진모와 술집 주인 원부연
연대 기찻길 옆 옥탑방서 공연 실험

연극 '아무도 아닌'으로 초연 무대
무용· 전시 등 다양한 장르 아울러

[한겨레]

신촌극장 개관작 <아무도 아닌>의 리허설 장면. 신촌극장 제공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 기찻길 옆. 하숙방, 자취방이 밀집한 창천교회 맞은편 골목. 늘어선 낮은 건물 사이로 비좁은 골목길 풍경이 펼쳐진다. 신촌극장(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13길 17)은 이 골목길 안에 있다. 간판이라곤 가로 50㎝, 세로 20㎝의 작은 명판이 전부. 길눈이 밝지 않은 초행자라면 극장을 놓치고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운 좋게 간판을 발견했대도, 극장을 향해 오르며 제대로 찾아왔는지 한번쯤은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복도 계단에는 일반 가정집의 생활폐기물과 짐이 널려 있다. 신촌극장은 이 건물 옥탑에 있다.

넓지도 않다. 외부 테라스 공간까지 더해 가로 7.5m, 세로 9m. 내부 공간만 따지면 공간은 더 협소해진다. 일반 극장에 비하면 무대만큼도 안 되는 면적이다. 이 협착한 공간에서 극장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는 30대 연극연출가 전진모와 인근에서 술집 모어댄위스키를 운영하는 원부연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선후배로, 같은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던 두 사람은 지난겨울 극장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지인들의 도움과 텀블벅 후원을 진행하여 자금을 마련한 두 사람이 극장의 모양새를 갖춰 신촌극장을 개관한 것은 지난 6월3일이다.

신촌극장 개관작 <아무도 아닌>의 리허설 장면. 신촌극장 제공

그리고 3개월여의 시험운영을 거친 신촌극장이 20일 본격적으로 개관했다. 개관작은 극단 ‘전화벨이울린다’의 연극 <아무도 아닌>이다. 공연은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 수록된 단편소설 ‘누구도 가본 적 없는’과 ‘양의 미래’ 두 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중년이 되어 처음 국외여행을 떠나게 된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에겐 14년 전 사고로 잃은 아이가 있었는데, 소설은 부부가 결국 서로마저 잃어버리는 상황을 담고 있다. ‘양의 미래’는 학창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든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가난한 여성의 신변잡기를 다룬 듯한 소설은, 그러나 중반 이후 다른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사건은 어느 봄날 그가 일하던 서점 옆에서 한 소녀가 행방불명되면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의 최후 목격자가 된다. 두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주지하듯 아이의 부재다. 소설의 무대화를 맡은 이연주 연출은 두 소설에서 상실, 가난, 그리고 삶과 죽음의 세 가지 키워드를 길어 올렸다.

이연주 연출은 “최대한 담백하게 연출할 생각이다. 극장이 협소하니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는 대신 같이 숨쉬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그래서 책을 읽었을 때 상상되는 이미지를 무대 위에 구현해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들과 함께 소설을 보는 느낌을 주고자 한다. 관건은 작품 속 심리적인 시공간, 즉 멈춰버릴 수밖에 없던 순간들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아무도 아닌> 이후엔 사운드디자이너 목소와 작가 허영균의 협업 작품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이후 연출가 전윤환, 안정민 등의 연극과 안무가 최은진, 장현준, 윤자영의 무용, 그리고 최윤석 작가의 전시가 준비 중이다. 명칭은 극장이라 하나, 공연만 상연하는 극장이 아닌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문화예술 공간인 셈이다.

신촌극장 개관작 <아무도 아닌>의 리허설 장면. 신촌극장 제공
신촌극장 외관. 신촌극장 제공

극장 운영을 맡은 전진모 대표는 “신촌극장은 담론을 나누는 살롱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장르 불문, 다양한 예술가들이 예술과 인생, 사회 등의 주제에 대해 관객들과 함께 토론을 나누는 공간을 지향하는 게 그 목표라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작지만, 작아서 가능한, 작아서 할 수 있는 일들로 좋은 파문을 일으키는 극장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오직 개성’이란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경제학에서 미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물적 조건이 상이하면 상이한 미학이 발생한다는 뜻이고, 더 쉽게 말하자면 가난한 영화에는 특유의 멋진 매력이 따라서 생긴다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영화’의 자리에 ‘연극’, ‘극장’을 놓아도 의미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가난한 극장에는 특유의 멋진 매력이 따라선 생긴다는 소리다.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