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씨티은행 '약탈 대출' 반대 간부에 심부름 등 '8년째 모욕적 인사'

이혜인 기자 2017. 9. 2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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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씨티은행이 입사 20년이 넘은 지점장급 직원에게 단순 복사·스캔과 서류배달, 전화영업 업무를 8년 동안 시켜온 사실이 드러났다. 회사 측은 내부 인사규정까지 바꾸면서 주로 계약직 직원과 신입행원들이 맡는 업무를 이 직원에게 시켰다. 법원은 회사가 직원들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인사규정까지 변경해가며 이같은 업무를 맡긴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한국씨티은행 본점. 경향신문 자료사진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ㄱ씨는 1985년 씨티은행 전신인 한미은행에 입사했다. 입사 후 20년 동안 그는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우수직원이었다. 매년 평균 이상의 근무평가를 받았고, 회사에서 선진금융기법을 배워오라며 미국 시애틀의 다른 은행에서 일할 기회까지 받았다. 은행에서 자체적으로 주는 은행장상을 세 차례 수상했으며 정부부처에서 주는 장관상도 받았다. ㄱ씨는 무리없이 승진을 거듭하면서 센터장, 지점장 등을 맡는 2급까지 승진했다.

2급 직원이 된 직후인 2001년 ㄱ씨는 개인금융팀으로 발령받았다. 은행 측은 ㄱ씨가 수익을 많이 안겨주는 고금리 상품인 카드론이나 담보대출 상품을 개발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ㄱ씨는 이같은 ‘약탈적 대출’을 제1금융권인 은행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적극적 상품 개발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ㄱ씨의 인사는 상식적인 은행원이 납득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수난이 시작됐다.

회사는 2002년부터 ㄱ씨를 좋은 실적을 내기 어려운 지점의 지점장으로 연속해서 배치했다. 전임 지점장이 대형 금융사고를 내면서 신뢰도가 떨어진 지점을 거쳐 기업대출 부문의 영업이 중단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ㄱ씨의 성과는 이전에 비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2009년부터 회사는 ㄱ씨에게 주로 연차가 낮거나 20~30대 젊은 계약직 직원들이 담당하는 업무를 맡겼다. 서울 용산의 텔레마케팅 센터에서 금융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텔레마케팅 일을 했으며 주로 30~40대 계약직 직원으로부터 업무 지시와 감독을 받았다.

2년 후, ㄱ씨는 서울 도심에 있는 한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점으로 돌아왔으나 업무 환경은 오히려 텔레마케팅 센터에 있을 때보다 악화됐다. 지점 직원들과 협업없이 혼자서 대기업을 상대로 대출영업을 하며 마치 ‘왕따’같은 생활을 했다. 반 년 후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은 뒤에는 강남의 영업점 몇 곳을 돌아다니며 빈 책상 아무 데나 앉아 일을 했다. 하루 종일 은행 거래 내역이 적힌 전표에서 틀린 곳이 있는지 검사하는 일만 했다.

이후에도 ㄱ씨의 잦은 인사이동은 멈출 줄 몰랐다. 신용카드 발급 희망자로부터 발급 관련 서류를 받아오는 단순 서류 배달 업무에서부터 지점에서 올라온 서류를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스캔만 하는 업무,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면서 이상금융 거래가 없는지 체크하는 일 등을 맡았다.

ㄱ씨가 맡은 업무들은 통상 젊은 계약직 직원이나 신입 행원들이 하는 일이었다. 30년 이상 씨티은행에 근무한 직원은 “2급 이상이라면 지점장을 맡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한 부서에서 고참으로서 전문 업무를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씨티은행이 2005년에 (한미은행과) 합병한 이후로 ‘몇년 출생자 이상의 고연차 직원들은 알아서 나가라’식의 분위기가 심해지면서, ㄱ씨같이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는 경우들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씨티은행은 높은 직급의 직원들에게는 맞지 않는 단순업무를 맡기기 위해 내부규정까지 직원들 동의없이 변경했다. 2007년 10월 이전 씨티은행의 인사규정 중 ‘직급별 직위대응표’를 보면 1·2급 직원들은 센터장·지점장·본부장 등의 직무를, 3급 이하 직원들은 심사역·개인고객전담역·조사역 등을 하도록 구별돼있다. 그럼에도 ㄱ씨는 3급 이하가 맡는 심사역을 맡거나, 어떠한 직무도 부여받지 못한 ‘직위 미부여’ 상태로 일했다.

ㄱ씨와 같이 직급에 맡지 않는 직무를 부여받아서 일한 1급 직원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회사가 부당하다는 취지의 소송을 내서 승소한 직후, 회사는 직원들에게 고지하지 않고 2007년 10월 내부 인사규정까지 변경했다.

ㄱ씨는 결국 씨티은행을 상대로 인사규정 변경이 무효이며 이에 근거한 자신의 인사발령이 무효라는 취지의 민사소송을 내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민사부(재판장 권혁중)는 지난 21일 “전직명령은 무효인 인사규정에 근거한 것이어서 (ㄱ씨의) 전직명령은 무효다”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회사의 내부규정 변경이 근로기준법을 어긴 것이라고 판단해 ㄱ씨 손을 들어줬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인사규정과 같은 ‘취업규칙’이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쪽으로 변경될 경우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집단의 동의가 필요하다. 재판부는 “(인사규정 변경이)실질적으로는 징계의 일종인 강등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해 그 적용을 받게 되는 노동자들의 불이익이 결코 적지 않다”고 밝혔다. 또 “불이익 변경 시 피고(회사)가 어떤 노동자 집단으로부터도 동의를 받지 않은 점”을 문제로 짚었다.

ㄱ씨 소송대리인인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노주희 변호사는 “앞으로 씨티은행이 1·2급 직원들에게 심사역이나 조사역 같은 업무를 시킬 수 없으며, 정당하게 발령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씨티은행 측은 “인사규정을 개정한 것은 ‘직급별 직위대응표’에 있던 오류를 바로잡은 ‘오기 정정’이며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의 변경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ㄱ씨를 고의로 몰아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전직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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