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style_this week]차별받던 10세 소녀 뉴욕패션위크 점령하다

이도은 입력 2017.09.24. 00:01 수정 2017.09.2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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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에서 의미로..패션쇼의 진화
인종과 외모 차별, 임신부 소외 등
사회 문제 내세운 뉴욕패션위크 화제
패션이 예쁜 옷 말고 의식 있는 옷에 꽂혀
10살의 나이에 최연소 뉴욕패션위크 참가 디자이너가 된 체리스 로저스. [사진 체리스 로저스 인스타그램]
매년 9월 초면 세계 패션 시장이 대목을 맞는다. 다름 아니라 4대 패션위크가 열리기 때문이다. 뉴욕을 시작으로 런던·밀라노를 거쳐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 한 달간의 여정. 이를 통해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브랜드가 패션쇼를 연다. 늘 유럽이 콧대를 세우지만 2017년엔 유독 뉴욕 패션위크(9월 7~14일)에서 뉴스가 많았다. 자리를 옮긴 디자이너의 첫 쇼라거나, 새로운 장소에서 열렸다거나 하는 식이 뻔한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옷을 넘어서, 패션쇼 자체의 풍부한 이야깃거리로 주목받았다.
가장 먼저 꼽을만한 건 열 살짜리 디자이너 케리스 로저스(Kheris Rogers)의 쇼였다. 그는 역대 최연소라는 타이틀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다. 로저스가 선보인 건 단순히 예쁜 옷이 아니라 의식 있는 옷이었다. '내 피부색을 뽐낼래(Flexin' In My Complexion)' 라인으로, 인종과 상관없이 자신감을 가지라는 문구를 의상에 가득 박았다. 이유가 있었다. 흑인이 소수인 학교에 다녀 인종차별을 겪은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당시 선생님이 자화상을 그리라면서 검은색 크레용을 쥐여주자 크게 상심했다. 이를 알게 된 로저스의 열두 살 많은 언니는 동생에게 모델처럼 당당하게 사진을 찍어보자고 권유했고, 그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수만 명의 팔로워를 이끌었다. 이후 직접 옷을 만드는 일을 벌였다. 배우 루피타 뇽이나 가수 앨리시아 키스 같은 유명인들이 그 옷을 입게 되자 패션위크로 가는 길이 더 탄탄해졌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계기를 만든 것에 뿌듯하다"면서 "나이가 어리든 많든 꿈을 이루는 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고 말했다.
'내 피부색을 뽐낼거야'라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은 체리스 로저스. [사진 체리스 로저스 인스타그램]
체리스 로저스의 인스타그램에는 패션 모델처럼 꾸민 그의 모습을 본 팔로워들이 '아름답다'는 댓글을 남겼다.[사진 체리스 로저스 인스타그램]
이번 시즌 처음 패션위크에 참가한 여성복 토리드(Torrid)의 패션쇼 역시 눈길을 끌었다. 토리드는 빅사이즈(10-30) 전문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뉴욕패션위크에 입성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인 애슐리 그레이엄이 '모델스 닷컴'이 선정한 '가장 섹시한 모델'로 선정되거나 영국 보그 표지 모델이 된 적은 있었지만 주류 패션 무대에서 모델 전원이 플러스 사이즈인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를 위해 브랜드 측은 5월부터 석달 간 로스앤젤레스·시애틀·애틀랜타 등에서 선발 대회를 열었고, 1만 명 이상의 일반인 지원자 중 10명을 뽑아 런웨이에 세웠다. 토리드 디자이너 엘리자베스 뮤노스는 "미국 여성들의 60%가 플러스 사이즈"라며 "패션업계도 이를 인정하고 모델에 대한 관점을 바꿀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토리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 10명을 런웨이에 세우는 패션쇼를 통해 최종 우승자를 선발했다. [사진 토리드 홈페이지 캡처]
토리드 패션쇼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 [사진 토리드 홈페이지 캡처]
이외에도 놀라운 '최초'는 또 있었다. 임신한 배를 그대로 드러낸 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디자이너 에카우스 리타 컬렉션에 임신 8개월 차 모델 마이아 루스 리가 올라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카디건 원피스를 입고 배 부분의 단추를 열어 맨살을 그대로 드러냈다. 과거 임신부 모델은 있었지만 이처럼 배 정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건 그가 처음이었다. 리는 쇼 직후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임신 이후 달라진 몸이 되자 옷을 살 때마다 왠지 무시 당하고 하찮은 존재가 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면서 임신부에 대한 패션계의 무관심을 토로했다.
뉴욕패션위크 토리드 무대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 [사진 홈페이지 캡쳐]
이들은 패션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킨다. 과거 패션쇼란 계절을 앞서 소수의 업계 관계자들(기자·바이어·스타일리스트·셀러브리티 등)에게 트렌드를 제시하고 생산·유통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비즈니스의 장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업계 이너서클이 설정한 본래의 목적은 요 몇 년 전부터 빠르게 퇴색해가는 중이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SNS를 통해 누구나 패션쇼를 관람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하이엔드 패션이 이끄는대로 대중이 스스로의 스타일을 바꾸지도 않는다.
미국 보그의 에디터 니콜 펠프스는
니트 원피스에 배 부분 단추를 열어 맨 살을 그대로 노출시킨 모습. [사진 니콜 펠프스 인스타그램]
그렇다면 이제 패션쇼의 역할은 뭘까. "그것은 굉장한 볼거리입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통한 홍보라 할 수 있겠죠." 트렌드 예측 기관인 미래 연구소(The Future Laboratory) 설립자인 마틴 레이몬드가 과거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패션쇼는 문화의 장"이라며 더이상 패션 비즈니스에만 속하는 영역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요즘 트렌드를 살펴보면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쇼장에 모형 로케트를 설치하고(샤넬), 에스컬레이터를 놓고(마크 제이콥스), 거대한 정원을 만들어내는 일(디올)이 그다지 놀랍지 않을 정도로 패션 하우스의 무대 스케일은 점점 더 커지는 중이다. 반면 그 다른 한편에서는 허름한 중국 식당과 백화점 복도(베트멍), 혹은 유서 깊은 사원(구찌) 등을 쇼장으로 택해 뉴스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본의 규모가 뭐가 됐든 '더 놀랍게, 더 새롭게'라는 명제가 중요한 셈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앞서 언급한 뉴욕패션위크의 무대들은 패션쇼가 또다른 국면을 맞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를 넘어 '의미'로 대중 사로잡기 말이다. 옷을 보여주기까지, 왜 패션쇼가 필요했고 왜 런웨이에 나섰는지에 이유와 명분이 분명했다. 옷을 매개체로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끌어 들임으로써, 패션쇼는 더이상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맞닿아 있었다. 소셜 미디어가 기폭제가 된 것도 물론이다. 이걸 '다양성의 시대'에 걸맞는 패션쇼의 진화라고 봐야 할까. 패션계에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