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법]'성희롱'보다..'성희롱 신고'를 더 두려워하는 사회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2017. 9. 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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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더 무서운’ 회사 내 신고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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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씨(가명)는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뒷산을 오른다. 같은 팀 직원들은 끼리끼리 식당으로 가지만 언제부터인가 민정씨는 홀로이다. 동료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민정씨가 다가가면 금세 조용해졌다. 그때부터 혼자 점심을 먹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올해부터는 아예 샌드위치를 간단히 먹고 한 시간쯤 회사 뒷산을 산책하고 온다. 동료 선희씨가 운동하고 싶다며 며칠 같이 다녔을 때 민정씨는 내심 좋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팀장이 선희씨에게 근처 피트니스센터에 같이 나가자고 했다. 민정씨가 다시 혼자가 되기까지는 채 한 주도 걸리지 않았다.

■ 4년 전, 민정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2013년 봄, 민정씨는 직속 파트의 최고책임자인 이사에게 자신의 성희롱 피해를 알렸다. 당시 팀장이었던 김모씨는 사무실에서, 사내 메신저로, 사내 카페에서,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 1년 가까이 민정씨를 성희롱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된 민정씨가 이사를 찾아가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곧 회사 인사팀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여자가 먼저 꼬신 거라더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퍼졌다. 사건 조사를 맡은 인사팀 직원이 다른 직원들에게 ‘성희롱 사건은 남자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게 대부분이다’ ‘여자가 성격이 보통이 아니더라, 아마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민정씨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회사는 조사를 끝내고 팀장 김씨에게 정직 14일의 경징계를 내렸다. ‘내가 마사지를 잘하는데 온몸에 아로마 오일을 쫙 발라서 전신마사지를 해 줄 수 있다’는 김씨의 말 한마디만 성희롱으로 인정됐고, 1년간 팀장의 성희롱으로 괴로웠던 민정씨는 불쌍한 유부남을 먼저 유혹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민정씨는 성희롱을 한 팀장과 사건 조사 과정에서 허위소문을 유포한 책임이 있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민정씨가 모르는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료를 준비하는 데에는 다른 부서에 있던 강모 대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회사는 갑자기 강 대리의 근태조사에 착수했다. 인사담당 이사는 강 대리의 상사를 통해 강 대리에게 ‘민정씨와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회사는 손해배상청구 소장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근로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 대리에게 정직 1주일의 징계를 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징계가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강 대리는 징계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이유를 찾자면 오로지 강 대리가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민정씨를 도왔다는 것밖에 없었다. 강 대리는 이렇게, 민정씨를 도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다른 직원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강 대리의 징계가 끝나자 민정씨에 대한 징계절차도 시작되었다. 회사는 민정씨가 부하 직원에게 협박성 발언을 하면서 소송에 필요한 진술서를 쓰게 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실제로는 회사가 내세운 징계사유가 정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징계에 대해서도 중앙노동위원회는 부당징계라고 판정했다.

민정씨 징계가 있은 지 한 달여 후, 회사는 민정씨에게 업무분장 조정 통보를 했다. 원래 민정씨가 담당하고 있던 전문업무를 비전문업무로 변경하는 내용이었다. 바뀐 업무는 당장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한직이었고 민정씨가 그 이전에는 한번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민정씨와 강 대리가 받은 회사의 징계가 부당하다는 지방노동위원회 결정이 내려진 날로부터 이틀 후, 회사는 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이유를 만들어 강 대리에게 직무정지와 대기발령을 통보했다. 곧이어 민정씨도 직무정지와 대기발령을 통보받았다. 대기발령 장소는 전기와 난방이 되지 않는 빈방이었다.

2015년, 민정씨가 회사를 상대로 냈던 손해배상청구 2심에서 회사가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곧바로 민정씨는 2015년 업무 평가에서 최하위 고과를 받았다. 그해 민정씨의 업무는 해외 본사의 신규 제품을 한국 제품에 맞게 현지화하는 것이었다. 제품 샘플 하나 없이 엑셀 파일 24개만 받았지만 민정씨는 최선을 다했다. 사건 이후 커피 한잔 마시자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어렵사리 다가가 물어가며 열심히 했다.회사 안의 그 누구도 민정씨 업무에 관해 언급하거나 조언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다. 결과는 최하위 고과인 F. 평가사유는 디자인 부서와 협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을 감내하며 버티는 이유는

팀장의 성희롱이 처음 시작된 후 5년, 회사에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한 후 4년이 지나는 동안 민정씨에게 사직을 권유하고, 거짓 소문을 내고, 부당한 징계를 내리고, 업무 감시를 하고, 회사를 위해서 진술했던 사람들은 모두 승진하고 잘나간다. 민정씨가 지금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승진은커녕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업무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신입사원과 같은 업무를 가끔 받을 뿐이다. 전문성을 쌓고 한참 더 일할 나이인데 매일 도태되는 느낌, 회사 안에서 외딴섬처럼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 들 때면, 그냥 내 발로 회사를 걸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정씨는 생각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며 이렇게 회사에서 버티고 있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정씨는 대법원에 내는 탄원서를 썼다. 이 구절을 넣으면 나의 상황이 잘 전달될까, 최종 판결은 언제 날까, 판결이 나면 나는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에 전념할 수 있을까, 나를 공격하고 비방하며 회사 편에 섰던 직원들이 모두 승진하고 남은 그 자리에서 근심 없이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민정씨는 오늘도 회사 뒷산을 오르며 묻고 또 묻는다.

■ 피해를 말할 때 무릅써야 하는 것

민정씨가 직장 내 성희롱을 회사에 알리고 지난 4년간 겪은 일은 비단 민정씨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서울여성노동자회의 2016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상담한 조사 대상자 103명 중 57%에 해당하는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 문제 제기로 인해 회사로부터 불이익조치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또 다른 민간단체인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상담실의 2014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불이익조치 상담은 성희롱 상담 189건 중 73건으로 38%를 차지했다. 불이익조치의 유형은 다양하다. 해고, 징계, 비난, 집단따돌림, 악의적 소문 유포, 폭행 또는 폭언, 전보, 전근, 직무 미부여, 직무 재배치, 의사에 반하는 인사조치, 업무상 부당 대우를 망라한다. 이런 불이익조치의 실질은 피해자가 성희롱 신고를 해서 문제를 일으킨 데 대한 보복이라 할 수 있다. 직장 내 성희롱 자체가 문제인데 신고가 문제라니 어리둥절해지지만, 우리 현실은 성희롱 신고가 조직을 해하는 더 심각한 문제라고 보는 직장이 이토록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피해자의 침묵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6년 성희롱 2차 피해 실태 연구결과에서는, 설문 응답자 450명 중 40%에 해당하는 181명이 성희롱 피해를 입었을 경우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유는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고용상의 불이익을 우려해서” “처리 과정의 스트레스 때문에” 등이다.

우리 법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입는 2차 피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사업주의 의무를 정하고, ‘불리한 조치’를 한 경우 형사처벌하는 조항을 두고 있다.

민정씨도 회사의 불이익조치가 계속되자 2014년 회사를 이 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하지만 민정씨가 고소장을 낸 지 3년이 넘었지만 수사조차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수사지연 그 자체가 민정씨의 회사 내 고립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직장 내에 성희롱이 없는 일터를 바라지만, 그 이전에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한 노동자가 2차 피해를 입을 걱정 없이 정당하게 자기 피해를 구제받고 사건 발생 전과 다름없이 노동할 수 있는 일터가 먼저이다.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사용자에게 알렸을 때 사용자가 언제, 어떤 의무를 구체적으로 부담하는지,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되는 불이익조치는 무엇인지 법에 명확히 정하고, 불이익조치가 발생할 경우 고용노동청, 검찰, 법원의 각 단계에서 신속히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공익 변호사 단체 ‘공감’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은 법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정의와 보살핌의 도구가 되도록 공익변호사들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공감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kpil.org)에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공감의 모든 활동은 100% 회원의 기부로 이루어집니다.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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