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밖 문소리의 한소리 “내가 새판 만든다”

조남주 작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감독·주연 문소리

한국에서 여배우로,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촬영현장에서 감독·주연을 맡은 문소리.

한국에서 여배우로,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촬영현장에서 감독·주연을 맡은 문소리.


남성 서사로 꽉찬 영화 속 배우 문소리의 역할은 없는데
딸·며느리·엄마·배우…일상 역할은 너무 많은 아이러니

알려진 얼굴로 ‘시선 폭력’ ‘외모 품평’ 무례·불편 다반사
가족·주변인은 협찬사진 종용 등 자신을 액세서리로

그래서…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
불평만 하고 있을 순 없어 자기 자신 연기하며
여배우이자 18년차 사회인으로서 목소리 내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은 문소리. 우리가 아는 그 문소리다. <박하사탕>의 첫사랑이자 <오아시스>의 한공주. 배우 문소리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데뷔 18년차 대한민국 대표 배우이지만 요즘은 이렇다 할 배역이 없다는 여배우 문소리의 이야기다. 물론 진짜 문소리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실제 문소리가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영화화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문소리는 문소리를 연기한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지점에 묘하게 자리하는 이유로 감상은 영화 안에서 머물지 않고 한국 영화와 한국 사회 전반으로 넓어진다. 영화 속 문소리는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또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문소리가 캐스팅 거절 전화를 받으며 시작된다. 이후로도 줄곧 문소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옷 빌려 입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행사장에 찾아가 감독의 눈에 띄기 위해 애쓰고, 특별출연 제안이 달갑지 않지만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배우라는 직업이 제작자에게, 관객에게 선택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들어오는 제안이 많다면 이후의 선택권은 배우에게 넘어가겠지만 지금 문소리는 “안 바쁘다”. “집에서 애 키우고 시나리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수상 이력을 다 말하기도 입 아픈, 대한민국의 유명 감독들과 두루두루 작업해 온, “천하의 문소리”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없단다.

이 와중에도 문소리는 ‘대학생 아들을 둔 정육점 주인’ 역할을 계속 거부한다. 논쟁적일 수 있는 설정인데 특정 직업이나 역할에 대한 폄하는 아닌 듯하다. 여배우에게 한번 ‘엄마’ ‘중년’ ‘억척’ 같은 이미지가 붙으면 선택의 폭이 더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 배우들은 나이가 들면 드는 대로 역할이 계속 생긴다. 경찰이든 범죄집단이든 조직에서는 간부가 되고, 정치인, 학자, 기업인이 되고 과거로 가서 임금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로맨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근 기대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세 편이 약속한 듯 남녀 주인공의 나이 차이가 커 화제가 되었는데, 평균 16살 차이, 최대 스무 살 차이다. 남배우는 40대, 상대 여배우는 20대. 그럼 40대 여배우는 누구와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문소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김혜수, 전도연, 손예진 등 유명 배우들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검토할 시나리오가 없다, 배역 선택의 폭이 좁다고 토로했다.

남성 투톱, 스리톱 영화는 물론 남성배우들이 떼로 나오는, 대체로 범죄수사물은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여성 배역은 주로 희생하는 어머니, 철없는 딸, 잔소리하는 아내, 그리고 처참한 피해자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 흥행작 열 편 중 주연급 여성 배역이 있는 영화는 단 세 편. 그 영화들조차 남배우의 비율과 비중이 절대적이다. 관성처럼 남성 서사만 제작되는 현실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의미있는 여성 배역이 있을 리 없고, 여배우는 당연히 일이 없다.

잘 알려진 얼굴이기에, 특히 여배우이기에 불편과 무례를 겪기도 한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시선이 쏟아지고, 예쁘다, 안 예쁘다, 성형수술은 했느냐 등의 외모 품평도 일상적이다. 당장 일도 없고 돈도 없는데 “며느님 돈도 잘 버시는데”, “잘나간다고 유세하냐”, “여배우는 참 좋으시겠어요. 그런 드레스 맨날 입으시고” 하는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 듣는다. 호칭은 늘 ‘문소리씨’도 ‘문소리님’도 아닌 ‘문소리’다.

가장 피곤한 일은 일터와 일상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은행 업무를 보러 가서 사인을 해야 하고, 술집에서는 “언제 문소리와 술을 마셔보겠느냐”며 합석을 요구받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자랑스러워하지만 동시에 액세서리로 만들기도 한다. 시어머니는 병원 사람들에게 영화배우 며느리를 보여주고 싶고, 친정엄마는 치료비를 할인받기 위해 치과 협찬사진을 종용하고, 식당에서 받은 서비스 메뉴는 일행들이 맛있게 먹어치운다. 정작 당사자는 민망하고 죄송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문소리에게는 여배우의 역할만 있지 않다. 일하는 엄마 문소리는 아침부터 유치원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달랜다. 그러면 엄마가 힘들다고 애원해보지만 딸은 “나도 되게 힘들”단다. 그런 아이에게 윽박지르는 친정엄마의 육아 방식은 싫지만 맡기지 않을 수도 없다. 어린 딸과 친정엄마 사이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기만 하는 신세. 세 여자가 이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이의 아빠인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친정엄마에게 맡기든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든 육아는 여자들만의 과제인 듯하다.

이후에는 다시 은행 업무도 챙기고 온전치 않은 시어머니 병원에도 들른다. 딸, 며느리, 엄마, 아내, 그리고 배우. 배우 문소리에게는 들어오는 역할이 없는데 일상에서 해내야 하는 역할은 너무 많은 아이러니. 남편에게 하소연도 해보고, 만만한 매니저에게 괜히 짜증을 내면서 겨우겨우 버티는 문소리의 모습은 직장에서 퇴근하며 집으로 출근하는, 일과 육아와 가사와 집안 대소사까지 모두 떠안은 우리 주변 평범한 엄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여자들이라면 느끼는 미묘하고 불편한 감정들도 잘 드러나는데, 특히 영화 초반의 술자리 장면이 그렇다. 시작은 언제나 원치 않는 합석, 일행 중 한 명은 꼭 술을 못 이겨 고꾸라지고, 취한 남자들은 본인들의 외모는 생각하지도 않고 내내 동석한 여자들의 외모를 평가한다. 모든 주제에 대해서 아는 척하고 조언하고 재미없는 농담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문소리와 친구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너무 흔하게 봐 온 풍경이라 불쾌할지언정 놀랍지는 않다. 적당히 들어주고 태연하게 반박하고 적당히 자리를 피하지만,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사회생활 18년차의 처세.

장례식장에서 여자 후배를 대할 때도 그렇다. 미숙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후배가 한심하고 답답하지만 후배를 대하는 감정은 불쾌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깝다. 자신도 지나온 한 시절, 열악한 여건과 과잉 감정을 바라보는 불편한 마음. 조금은 공격적인 듯 보이지만 대뜸 말을 놓는 남자 동료와 달리 문소리는 끝까지 경어를 쓰면서 어이없고 황당한 모든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준다. 물어보고 들어주고 그리고 끝까지 나란히 걸어간다.

영화 속 ‘문소리’는 의외로 능동적인 인물은 아니다. 상황을 주도하지도, 판을 뒤집지도 못하고 조용히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영화 밖으로 감상의 폭을 넓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배우는 오늘도>의 감독이자 영화배우 문소리는 스스로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를 통해서 할 말을 한다. 문소리는 한 인터뷰에서 “너무 역할이 없다고 불평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며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영화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니까 판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판을 만든 것이다. 그 판을 더 키우는 것은 관객의 선택이자 역할이고, 이왕이면 이 판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여배우가 너무나 많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느 시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정희 시인의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 시를 여배우 버전으로 바꿔본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신인시절 매력 넘치고/ 연기력 뛰어나던 그녀/ 세계적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협찬사진을 찍고 있을까/ 곱게 메이크업을 받고 치과에 들러/ 친정엄마의 임플란트 열 개와 자신의 미소를 바꾸고 있을까/ 병든 시어머니 수발을 들고 있을까/ 정성스럽게 홍시를 까서 어머니 손에 쥐여 드리고/ 잊고 있는 재산은 없는지 묻고 있을까/ (…) // 국회의원 역할도 장관 역할도 의사 역할도 교수 역할도 되지 못하고/ 넘쳐나는 남자 영화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배우들은 어디로 갔는가”

▶필자 조남주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영화 밖 문소리의 한소리 “내가 새판 만든다”

<82년생 김지영> <고마네치를 위하여> 등을 썼으며 문학동네소설상, 황산벌청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로 10년 동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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