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영-천미란, 여자 레슬링 국가대표로 사는 법

입력 2017. 9. 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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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레슬링국가대표팀 막내 천미란(왼쪽)과 맏언니 황진영이 강원도 평창 전지훈련지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여자 레슬링 선수‘로서의 삶과 꿈을 전했다. 평창 | 남장현 기자
여자레슬링은 2004년 아테네 대회부터 하계올림픽 정식종목에 채택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레슬링의 현실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레슬링 자체가 비인기 종목인데다 생활 스포츠로도 깊이 자리매김하지 못한 실정이라 선수를 확보하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유년기부터 레슬링을 즐기고, 레슬링협회는 연간 140억원 이상을 운영비로 사용한다. 2020도쿄올림픽 전 종목 석권을 목표로 우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 속에 인프라는 잘 갖춰졌고, 선수 풀(Pool) 역시 아주 두텁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레슬링은 고대 올림픽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가장 기초적인 운동이지만 해외에서는 상당한 고급 스포츠로 통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려면 공부 이외에도 레슬링 등 특정 운동을 잘할 수 있어야 입학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만 유독 레슬링이 찬밥신세다. ‘춥고 배고픈’ 운동이란 막연한 선입관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생각처럼 항상 배고픈 스포츠가 아니다. 실업팀에서의 처우도 나름 좋은 편이다. 어린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들도 많다. 남자부도, 여자부도 똑같다. 여자레슬링대표팀 정순원 감독은 “사회적인 인식만이라도 전환되면 선수층이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에 등록된 레슬링 여자선수는 중학교·고등학교·대학·일반을 전부 합쳐봐야 20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 유도, 태권도 등 다른 종목을 하다가 전향한 경우도 적지 않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여자레슬링에서는 한 번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면 장기집권도 가능하다. 실력이 좋고, 기량을 유지하는 베테랑들이 오랫동안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버린 듯한 세대교체는 다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곳곳에서 희망의 싹이 움튼다. 최근 강원도 평창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한 여자레슬링대표팀도 높은 세계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건강한 땀을 흘리며 내일의 도약을 노래한다. 일본~중국~북한~몽골~베트남~인도~카자흐스탄 등 아시아권의 경쟁부터 만만치 않아도 조금씩 격차를 좁혀가고 있다. 여자대표팀 김은유 코치는 “부족함이 있더라도 하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뚜렷하다”고 설명했다.

여자레슬링대표팀 맏언니 황진영(34·창원시청·63㎏급)과 막내 천미란(18·충북체고·48㎏)을 통해 ‘국가대표 여자 레슬러’의 삶을 살짝 들여다봤다.

-여자레슬링에 입문한 계기가 궁금하다. 황진영(이하 황)=본래 유도를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도복을 입었다. 그러다 20세를 기점으로 레슬링 선수가 됐다. 처음에는 쫄쫄이 복장(몸에 착 달라붙는 유니폼)을 갖추려니 조금 부끄럽긴 했는데,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더라. 천미란(이하 천)=태권도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레슬링 선수가 됐다. 레슬링 5년차인데, 올해 7월 처음 국가대표가 됐다.

-서로가 부러울 때가 있을 텐데. 각자의 인상은 어땠나. 천=실력이 장난 아니다. 외부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대표팀 일원으로 본 언니는 엄청난 실력자다. 황=오히려 후배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 미란이만 해도 기본기가 철저히 갖춰졌다. 난 그럴 틈이 없었다. 이기는 노하우만 채웠다. 기초가 부족하다. 반면 기본이 탄탄한 후배들은 정말 빠르게 성장하더라. 확실히 플레이도 정밀하다.

-레슬링 국가대표의 인생은 어떤가. 황=레슬링에 살짝 발을 담구고 자세를 잡자마자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2008베이징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부지런히 달렸는데 코가 부러지더라. 운명이지. 이후 국가대표는 잊고 살았다. 국가대표 선발전도 제대로 소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마음이 바뀌었다. 어쩌면 선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기인데, 대충 뛰다가 사라진 선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선발전에 나섰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천=아직 얼떨떨하다. 또래들과 뛸 때는 몰랐던 많은 부분을 이곳 대표팀에서 채우고 있다. 이기는 방법이라고 했는데, 이는 경험하지 못하면 모른다. 노하우이자 센스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황=앞으로 얼마나 더 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운 시기다. 체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정도? 어쩌면 내부인 입장에서의 관리자로 볼 수 있겠다. 후배들을 관리해주고 가능한 노하우도 전달해주고. 천=열정이 아닐까 싶다. 선배들의 최대한 많은 부분을 흡수해 나만의 것으로 바꾸고 싶다. 예전에 1분 만에 패배로 끝나는 승부를 1분 1초로 늘리고, 또 1분 2초로 늘리면서 내성을 키우고 싶다. 황=선수들의 실력은 비슷하다. 그런데 태릉선수촌에 모인 모든 종목 선수들은 목표와 욕심이 많은 친구들이다. 하나라도 더 습득하려는 의지와 노력, 책임의식에서 마지막을 가른다.

-춥고 배고픈 종목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아쉽지 않나. 황=당연하다. 절대로 배고픈 종목이 아니다. 또 머리가 나쁘면 운동을 할 수 없다. 레슬링 선수의 삶이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 나름의 꿈을 지닌 직장인과 똑같다. 특별하다는 색안경부터 벗어주셨으면 한다. 단번에 바꿀 수 없지만 인식 자체는 점차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우리부터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야 하지만. 천=레슬링을 후회한 적이 없다. 당연히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은 안타깝다. 그런데 전혀 춥고 배고프지 않다. 환경도 점차 좋아지고 있다.

-목표가 있다면? 황=욕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 아닐까. 올림픽, 아시안게임 메달권 진입이 목표가 아니다. 다만 내 체급에서 날 완전히 뛰어넘는 후배들이 탄생했으면 한다. 단순히 언니를 이기는 것이 아닌 세계적인 수준까지 바라보는 우수 선수들이 계속 탄생해줬으면 한다. 레슬링이 정말 재미있다. 때론 너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 있다. 천=아시안게임 메달을 1차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올림픽 메달은 아직 언니들이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고 싶다.“

평창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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