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양승태 "온몸의 상처 견뎌낸 古木같은 법관이었길.."

조백건 기자 2017. 9. 23. 03: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제 대법원장 퇴임식]
"가시밭길 걷는 것 같았다"며 '古木 소리 들으려면' 詩 인용
"진영논리가 사회 곳곳 물들여" 정치권의 사법권 간섭 경계
"법관 독립은 민주주의 위한 것" 일부 법관들에게도 일침

22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1층 대강당. 양승태 대법원장의 퇴임식이 열렸다. 담담한 어조로 퇴임사를 읽어 내려가던 양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일은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던 것 같다"며 오현 스님의 시(詩) '고목 소리 들으려면'을 인용했다. 양 대법원장은 기독교 신자지만 불교계 원로인 오현 스님과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오현 스님은 이날 퇴임식에도 참석했다.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古木) 소리 들으려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양 대법원장은 이어 "제가 그저 오래된 법관에 그치지 않고 온몸과 마음이 상처에 싸여 있는 고목 같은 법관이 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과 행복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법관으로 임용된 날이 1975년 11월 1일이니 오늘까지 법관으로 거의 마흔두 해를 재직해온 셈"이라며 "법관직은 제 인생의 전부였고 올해로 69년이 된 사법 헌정사의 3분의 2에 가까운 기간을 사법부에 몸담아 애환을 같이해온 산 목격자이기도 한 것 같다"고 돌이켰다.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임식을 마친 양승태 대법원장이 차에 오르기 전 행사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양 대법원장은 퇴임사를 통해 “그저 오래된 법관에 그치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이 상처에 싸여있는 고목 같은 법관이 될 수 있다면 더 없는 영광과 행복으로 여기겠다”라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양 대법원장은 A4 용지 9장 분량의 퇴임사를 직접 썼다고 한다. 그는 올 초 불거진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파문으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참담한 마음"이라며 두 차례 대국민 사과도 했다. 그런 그의 심경이 퇴임사에 녹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법원 관계자들이 적지 않았다.

양 대법원장은 퇴임을 앞두고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소감을 묻자 "다시 (법원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6년여 전 대법관 임기를 마칠 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대법원장으로 지명받아 돌아왔다. 한 법원 관계자는 "양 대법원장이 당시 일을 되새기며 농담조로 한 말이었지만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양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우리 사회와 법관 후배들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가치관이 조화롭고 평화로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상충하는 가치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갈수록 격화돼 거의 위험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모든 사람을 우리 편 아니면 상대편으로 줄 세워 재단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자신의 주장만 강변하며 다른 쪽 논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진영 논리의 병폐가 사회 곳곳을 물들이고 있다"고 했다. 여권 등이 '한명숙 재판' 등에 대해 법원을 비난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양 대법원장은 또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법관 독립 원칙은 법관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일선 법관들의 튀는 판결이나 정치적 발언 등을 경계한 발언으로 보인다.

'양승태 사법부 시대'는 오는 24일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법조계 일각에선 "보수 대법원의 퇴장(退場)"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25일 취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는 법원 안팎에서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양 대법원장은 취임 초부터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과 현안에 대한 대법원의 적극적 역할과 법률 해석을 주문했다.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 활성화는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 6년간 전원합의체 판결은 116건으로 이용훈 전 대법원장(96건), 최종영 전 대법원장(62건) 시절보다 훨씬 늘어났다.

전원합의체는 2015년 '전관예우' 논란을 낳아 온 변호사의 형사 사건 성공 보수를 금지시키는 판결을 했다. 가족 관계 분야에선 부부 사이의 강제 성관계를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판결, 외도 등 잘못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 청구를 할 수 없다는 판결 등을 내놓았다. 2013년 정기적이고 고정적으로 지급해온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은 두고두고 논란을 낳고 있다. 전원합의체는 또 통진당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 선동 혐의에 유죄를 선고했고,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 선언 활동은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 등을 침해해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양승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3대0' 전원 일치 판단을 내린 사건 비율은 33.6%로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53%에 비해 낮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