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과학자 '유전자 붓'을 쥐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17. 9.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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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날개 무늬의 비밀
6000만년 동안 진화하며 다양한 날개 무늬 만들어
색소·무늬 유전자 잘라 날개 모양 변화시켜
황제나비의 평소 날개(왼쪽)와 윈트A 유전자를 차단해 가장자리의 검은 띠가 사라진 날개(오른쪽)./미 조지워싱턴대

세상에는 2만종이 넘는 나비가 있지만 날개의 무늬나 색은 천차만별이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숱한 성(性)선택과 자연선택을 거친 결과이다. 나비들은 짝짓기에서 상대를 가장 잘 유혹할 수 있고, 천적의 눈에 무서운 뱀이나 독수리의 눈처럼 보이는 무늬를 갖게 됐다.

자연을 화려하게 채색하던 붓이 이제 인간의 손에 쥐어졌다. 지난 11일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는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로 나비의 특정 유전자를 차단시켜 날개 무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논문 두 편을 실었다. 진화의 오랜 비밀이 드러날 시간이 다가왔다.

◇황제나비의 검은색 윤곽 사라져

미국 조지 워싱턴대의 아르노 마틴 교수는 파나마의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 과학자들과 함께 '윈트A(WntA)'란 유전자에 주목했다. 이 유전자는 곤충의 발생 과정에서 특정 형태의 세포들이 조직에서 정해진 위치에 생겨나도록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연구진은 네발나빗과(科) 나비 7종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이 유전자를 차단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실제 가위가 아니라 편집하려는 DNA에 달라붙는 유전물질과 그 부분을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을 결합시킨 형태다. 나비의 알에 유전자 가위를 넣자 윈트A 유전자만 잘라냈다. 나중에 고치에서 나온 나비는 날개에서 굵은 선들이 달라졌다.

한 예로 황제나비의 날개는 테두리에 굵은 검은색이 있고 중간중간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다. 윈트A 유전자가 차단되자 테두리 검은색이 하얗게 변했다. 날개에 있던 독특한 점 무늬들도 사라지고, 날개를 이루는 네 개의 주요 띠도 모양이 달라졌다. 사람으로 치면 얼굴 윤곽이 변한 셈이다.

◇노란색이 푸른 금속 광택으로 돌변

코넬대의 로버트 리드 교수 연구진은 날개의 색에 주목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역시 네발나빗과 4종에서 '옵틱스(optix)' 유전자를 잘라냈다. 이 유전자는 나비 날개에서 색소(色素)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전자 편집 결과, 4종 모두에서 붉은색과 오렌지색 색소가 검은색 색소로 대체됐다.

색만 변한 게 아니다. 공작나비는 옵틱스 유전자가 차단되자 갈색과 노란색이 사라지면서 파란색 광택을 띠기 시작했다. 파란 색소가 생긴 게 아니다. 바로 구조색이 변한 것이다.

색소는 특정 빛을 반사하고 나머지는 흡수해 열로 소멸시킨다. 그런데 광택이 나는 파란색으로 유명한 모포나비의 날개에는 파란색 색소가 없다. 대신 날개에 덮여 있는 비늘 표면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잔가지들이 나있는 광결정(光結晶) 구조가 있다. 모포나비의 광결정은 파란색 파장의 빛만 반사시켜 우리 눈에 보이게 하고, 나머지 파장의 빛은 그대로 통과시킨다. 광결정의 구조가 색을 결정한다고 해서 구조색이라고 한다.

결국 옵틱스 유전자는 색소와 광결정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리드 교수는 옵틱스 유전자를 '그림 붓(paintbrush) 유전자'라고 불렀다.

나비는 6000만년 동안 진화를 거치면서 다양한 날개 무늬를 만들어냈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붓 역할을 한 유전자들을 찾아낸 것이다. 조지 워싱턴대 마틴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하면 6000만년에 걸친 나비 진화에서 언제 어디서 서로 다른 무늬와 색의 나비들이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진화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동식물의 색과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 붓’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편집해 탄생한 새로운 모습들. 1자주색을 띠는 일반 나팔꽃(오른쪽)과 색소 관련 유전자를 편집해 나온 흰색 나팔꽃. 2작은멋쟁이나비의 날개 무늬(왼쪽)와 윈트A 유전자를 편집해 윤곽이 달라진 무늬(오른쪽). 3공작나비의 옵틱스 유전자를 편집해 갈색과 노란색 색소가 사라지고 광택을 띠는 파란색 비늘이 생긴 모습./일본 쓰쿠바대·PNAS·미 코넬대

◇나팔꽃 색도 마음대로 조절

같은 전략은 식물에서도 통한다. 일본 쓰쿠바대의 오노 미치유키 교수 연구진은 지난달 말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 하나를 변형시켜 일본에서 정원식물로 유명한 나팔꽃의 색을 자주색에서 흰색으로 바꿨다고 발표했다. 식물의 줄기·잎·꽃 색깔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좌우한다. 나팔꽃에서 이 색소를 만드는 효소는 '디하이드로플라보놀-4-리덕테이즈-B(DFR-B)'라는 유전자가 만든다.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DFR-B 유전자를 차단했다. 그러자 자주색 줄기와 꽃이 초록색 줄기와 흰꽃으로 변했다.

나팔꽃은 8세기에 중국에서 파란색 야생화로 일본에 전해졌다. 이후 1631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흰색 나팔꽃을 그린 그림이 나왔다. 바로 자연적으로 생겨난 흰색 돌연변이를 그린 것이다. 쓰쿠바대 연구진은 "결국 자연에서 거의 9세기 만에 이룩한 일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1년도 안 돼 달성했다"고 밝혔다. 동식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붓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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