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호접란 12종 개발한 名人.. "비단같은 삶 아니라 걸레같이 살 것"

태안/이정구 기자 2017. 9.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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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꽃 농가에 묘목 年10만개 공급 '최고농업기술 명인' 박노은씨
어깨너머로 배운 농사 지식
꽃 농사 제대로 지으려고 농대 전공 교재 혼자 공부
옥편·영어사전 찾아가며 한 쪽 넘기는데 일주일 걸려
호접란 품종개발 시작 땐 일본 책 구해다 독학했죠
첫째 아들 잃고 꽃 개발 매진
신입생 때 학교 연못 빠진 친구 구하다 목숨 잃어
아들이 만들지 못한 꽃, 아들 같은 꽃 만들고 싶었다
호접란으로 세상을 돕다
아프리카 잠비아 빈민 돕고 러시아 고려인엔 묘목 전달.. 베트남엔 재배기술 전수키로

12종의 신품종 호접란(서양란의 일종)을 홀로 개발한 박노은(69)씨는 1979년 꽃 농사를 시작하며 식물학개론 책을 집어 들었다. 꽃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어깨너머로 배우는 기술뿐 아니라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과대학 전공교재로 책 절반 이상이 한자와 영어였다. 소작농 집안 삼형제 중 둘째로,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그에겐 옥편과 영어사전이 없으면 한 문장도 읽기 어려운 교재였다. 한 쪽 넘기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세포(細胞) 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수십 번 뒤적였다고 했다.

1995년 호접란 품종 개발을 시작할 때는 일본 책을 구해 독학했다. 일본 글자 히라가나와 화학 원소기호부터 공부했다. 낮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화분과 씨름하고 밤부터 새벽까지 공부했다. 그렇게 쌓은 호접란 조직 배양 기술은 국내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는 1년 50만개 넘는 묘목을 미국으로 수출했고 지금도 전국 꽃 농가에 10만개 넘는 묘목을 공급하고 있다. 2003년 신지식인농업인, 2014년 농촌진흥청이 선정한 최고농업기술명인(화훼 분야)으로도 꼽혔고, 지난달에는 베트남 농업 연구기관이 박씨 농장 '상미원'을 찾아와 기술전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돌아갔다. 박씨의 자수성가 이야기를 들으려고 충남 태안군에 있는 상미원에 찾아갔다. 박씨는 책장에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뽑아 들었다. 1973년 인쇄, 값 500원이라고 적힌 책이었다.

호접란 명인 박노은씨에게 꽃향기를 맡아봐 달라고 하자 “이 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 답했다. 호접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잘 자라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존대했다. 싹 틔우고 꽃 피우기까지 4년 걸리는 호접란은 박씨에게 아들 같은 존재였다. / 신현종 기자

식물학책 읽는 운전기사

―무슨 책인가요?

"1971년 해군 운전병을 제대하고 군대 선배 소개를 받아 해군 초대 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여동생 손인실 여사 댁에 운전기사로 취직했습니다. 땅 살 돈을 모으려고 한 달에 3만원 받으며 운전했는데 기사는 비는 시간이 꽤 많았습니다. 손 여사님 댁 서재에 책이 많았는데, 시장 가시는 길에 조심스레 '저 책들을 읽어도 되겠느냐'고 여쭸더니 '박군, 책 많이 읽으면서 공부 계속하면 좋지!'라며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세계문학 전집이나 한국 소설처럼 읽기 쉬운 책들을 틈날 때마다 읽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이 가장 재밌어서 그때 산 첫 번째 책입니다."

―그 뒤로 계속 책을 읽었습니까.

"3년 정도 기사로 일하고 경기 포천에 땅을 사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뒀습니다. 평당 10원 정도 주고 1만평 넘는 땅을 사서 3년 동안 배추와 참외 농사를 지었는데 하는 족족 망했습니다. 마지막 해엔 배추 농사가 아주 잘됐지만 시장 출하일을 잘못 골라 헐값에 넘겼습니다. 농약값 내느라 아이 돌 반지와 결혼 패물까지 팔았던 터라 농사를 접고 다시 서울에 가서 운전기사를 했습니다. 미국 건설회사와 덴마크 선박회사에서 일했는데 손 여사 댁에서 일할 때 책 읽던 생각이 나 서점에 가서 식물학개론 책을 샀습니다. 책으로라도 농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씨가 운전기사로 일할 때 읽었던 ‘메밀꽃 필 무렵’과 독학으로 조직 배양을 공부할 때 본 일본 책 ‘식물 조직 배양의 세계’. / 이정구 기자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책을 볼 수 있습니까.

"회사가 조선호텔 근처에 있어 시내에서 운전을 많이 했는데 기사들 많이 가는 곳에는 대기실이 있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피우며 화투를 많이 쳤죠. 그때 월급이 16만원 정도로 좋은 편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빨리 농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틈날 때마다 근처 종로서적에 가서 원예육종학 같은 책을 봤습니다. 다시 농사지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운전기사였군요.

"괴짜, 별종이라고 했죠. 제가 모신 분들은 좋아했습니다. '미스터 호크'라는 덴마크 회사 한국지사장이 있었는데 제가 2년 정도 일하고 그만두려 하자 원하는 대로 월급을 올려줄 테니 남아달라고 한참을 부탁했습니다. 농사를 꼭 지어야겠다며 사표를 내자 결국은 조선호텔에 방을 빌려 제 환송회를 해줬습니다. 심부름하러 가 본 적은 있어도 호텔 방에서 파티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농약 잘못 뿌려 전 재산 말라죽기도

―그렇게 말리는 데도 농사로 돌아온 이유가 있습니까.

"농사만 한 일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그만둔 다음 군대 가기 전까지 남영실업공사라는 회사에서 전구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대우는 좋았는데 몸이 아픈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운전기사로 일할 때는 도박이나 술에 빠진 사람들을 자주 봤고요.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식량 자급자족도 안 됐던 때라 농사를 짓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꽃 농사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1979년 두 번째 운전기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서울 올림픽공원 터에서 200평 규모 온실과 국화 화분 100개를 인수했습니다. 한 번은 농약과 물 비율을 잘못 맞춰 국화가 전부 노랗게 말라버렸습니다. 이웃 농장 주인 조언대로 줬는데 텃세를 부리느라 일부러 잘못 알려줬는지 제가 미숙했는지 양이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근처 농장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꺾꽂이 기술부터 하나씩 배웠습니다."

―책 읽은 것이 도움 됐나요?

"포인세티아라는 빨간 꽃이 3m까지 크기도 하는 꽃인데 작을수록 상품성이 높습니다. 책에서 'B9'이라는 약품을 사용하면 식물이 자라는 크기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을 봤습니다. 약품을 구해다 책에 적힌 대로 뿌렸더니 작은 화분 크기로 예쁘게 자랐습니다. 다른 농장 것보다 키가 작아서 무조건 1등품이었고 상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제일 좋은 등급 가격이 1개 2000원이었는데 농장 꽃 전체를 개당 2500원 받고 넘겼습니다. 그 뒤로는 서점 원예 코너를 더 자주 찾았죠."

―크게 성공하셨네요.

"경기도 남양주에 더 큰 농장도 운영했고 몇 년 동안 승승장구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요. 그런데 무릎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가니 퇴행성 관절염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겨우 서른여덟 살이었는데 쪼그려 앉지도 못해 화장실 문고리를 붙잡고 엉거주춤 앉아 볼일을 봤습니다. 벌써 노인이 된 건가 싶어 서글펐고 농사를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88년에 이곳 태안으로 왔습니다."

아들 잃은 뒤 꽃에 더 매달리다

박씨의 태안 농장에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 아들 진규(41)씨다. 대학에서 유전공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진규씨는 2년 전부터 농장 일을 거들고 있다. 아들에 대해 묻자 내내 온화하던 김씨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위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었는데 스스로 원예육종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 입장에선 참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신입생 때 학교 연못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에 친구 둘이 빠졌는데 한 명을 구한 뒤 다른 친구를 구하다가 둘 다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습니까.

"삶의 목표를 잃은 기분이었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울 수도 없어 차 안에서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농장과 집 사이에 방을 하나 더 만들고 품종 개발 연구실로 삼았습니다. 일본어와 화학 원소기호 하나 몰랐지만 실험에 몰두하면 밤을 꼬박 지새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아들이 만들지 못한 꽃, 아들 같은 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씨는 먼저 떠난 아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호접란 12종을 만들었다. 2000년대 초반 개발한 '꼬마란'이 상미원의 상징이다. 기존 호접란보다 크기를 절반에서 3분의 1까지 줄인 품종으로, 박씨는 "'서양란은 비싸다'는 편견을 깨고 더 많은 사람이 사무실 책상이나 식탁에서도 꽃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해외 봉사활동도 하신다면서요?

"2013년 가톨릭 봉사단체를 따라 아프리카 잠비아에 갔습니다. 잠비아 상류층 사이에서 네덜란드산 호접란이 인기 있는데 값이 우리 돈 3만원 정도로 국내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서민들은 하루 1달러로 근근이 사는 나라인데 말이죠. 그때 현지 청년과 우리 봉사단 청년이 같은 날 말라리아에 걸려 둘 다 치료를 받았는데, 봉사단 청년은 이틀 정도 감기 앓고 괜찮아졌는데 잠비아 청년은 닷새 동안 고생하더니 죽었습니다. 영양 상태가 그만큼 나빴던 거예요. 잠비아 기후가 호접란 키우기도 좋아서 그곳 사람들이 호접란으로 돈을 벌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현재 농업학교와 온실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러시아도 다녀오셨죠?

"몇 년 전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호접란을 키워보고 싶다기에 묘목을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너무 추운 곳이라 키우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난해 말 성공했다고 연락이 와서 가봤습니다. 난방용 석탄이 한 트럭에 2만원 정도로 매우 싸서 수익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농사하며 어렵게 지내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많아서 기회 닿을 때마다 도울 생각입니다."

―앞으로 삶의 목표는 봉사가 됐습니까.

"사업은 둘째 아들에게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아들 방식이 이해되지 않아 다툴 때도 있지만 아들도 과거의 저처럼 실패하며 배우고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사회생활 시작할 때 저는 '비단 같은 삶이 아니라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내 몸이 더러워질수록 세상이 깨끗해지니까 말이지요."

박씨는 우리나라 꽃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꽃을 선물 받으면 리본에 적힌 이름만 보고 물도 주지 않아 제 수명을 살지 못하고 죽는 꽃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꽃을 좋아해서 잘 관찰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송이 한 송이가 소중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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