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hy] 초딩 일기숙제는 요즘 '멸종 위기'

송혜진 기자 2017. 9. 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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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 숙제 낼 때 눈치 본다는데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1. 인천 남동구 한 초등학교 교사 이모(36)씨는 작년부터 아이들에게 '일기를 써 오라'는 숙제를 내주지 않고 있다. 재작년 말 한 학부모가 '선생님이 아이 일기를 읽고 우리 집 속사정까지 알게 되는 것이 탐탁지 않다'고 항의해 온 뒤부터다. 이씨는 "몇몇 학부모에게서 '학원 숙제할 시간도 없는데 일기를 언제 쓰느냐'는 말을 듣고 이미 의욕이 상당히 꺾인 상태였는데 그런 항의까지 받고 나니 일기 숙제를 고집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아이가 일기를 쓰면서 기본적인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믿지만, 이런 사실을 부모에게 설득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 한숨 쉬었다.

#2. 서울 면목동에 사는 명유진(40)씨는 지난여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셋째 아이 방학 숙제를 보고 의아해했다. 일기 쓰기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담임교사에게 물어보니 "'방학 숙제로 일기를 내면 다들 막판에 한꺼번에 몰아 쓰느라 바쁘니 그냥 없애 달라'는 의견이 많아서 없앴다"고 했다. 명씨는 "학창 시절 방학마다 썼던 그림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살아온 나로선 아쉽게 느껴졌다. 일기 개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쓰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예 숙제를 내주지 않는 건 좀 아쉽더라. 요즘 선생님들이 여러모로 학생 지도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일기 검사는 아동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면서 교육부에 권고를 내린 게 2005년 일이다. 이후 학교 차원에서 일기 쓰기 숙제를 내주는 경우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행여라도 '사생활 침해' '정보보호법 위반' 같은 이야기가 나오거나 학부모 민원이 들어올까 걱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부 차원에서 일기를 쓰게 하거나 잘 썼다고 상 주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이 내려진 지 오래다. 상당수 초등학교에선 '일기 쓰기 지도는 교사 개개인 재량에 맡긴다'고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다. 일기 쓰기를 '독서록 쓰기' 같은 숙제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다.

일기 교육을 찬성하는 교사들은 그래서 매년 학기가 시작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왜 일기 숙제를 내주는지'에 대해 학부모 총회에서 설명하고 미리 동의를 받아둬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경기 성남 한 초등학교 교사 윤지영(43)씨는 "일기 쓰기의 좋은 점을 쓴 편지를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 부모님에게 나눠준 적도 있다"고 했다. 편지에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매일 일기를 썼다죠. 일기를 매일 쓰면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저절로 길러집니다'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서울교대 부설 초등학교 교사 김경혜(37)씨도 매 학기 초 학부모에게 일기 쓰기 숙제를 왜 내주는지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왔다. 매일 일기를 걷는 것도 아니다. 매주 두 편 이상만 써오면 된다.

김씨는 "일기는 때론 아이가 선생님에게 속마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차마 말 못 할 고민들, 한창 자라나는 아이의 마음속 갖가지 감정을 일기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아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지도하려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사실 일기 교육은 하다 보면 일만 늘어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아이가 '너무 쓰기 괴롭다'고 호소할 때면 고민되기도 하고요. 그래도 아이들이 간혹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일기에 써 놓은 걸 발견할 때면 '아, 이래서 일기를 봐야 그 아이를 제대로 알 수 있지' 싶어지죠."

일기 쓰기 대신 독서록 숙제를 내주면 된다는 의견도 물론 많다. 서울 명륜동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일기가 워낙 논란이 되니 독후감 숙제를 더 많이 내고 있다"고 했다. 한국교총 김동석 정책본부장은 그러나 "그건 걸음마도 못 하는데 뛰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매일 자기 얘기를 쓰는 훈련도 안 돼 있는데, 그걸 건너뛰고 책 읽고 요약해서 자기주장을 펴는 게 쉬울 리 없다는 설명이다.

일기 숙제가 계속 논란이 되면서 일부 학교에선 일기를 특별한 행사 날에만 써서 내라고 하기도 한다. 가령 '환경의 날'에는 '환경보호 일기'를, '과학의 날'에는 '과학 일기'를 쓰라고 하는 식이다. 김동석 본부장은 "일기는 원래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인데 그걸 제대로 가르치는 게 오히려 사생활 침해가 될까 두려워하다 보니, 어느덧 일기가 본래 목적을 잃고 또 다른 학습 도구로만 쓰이게 되는 건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일기 숙제를 내는 것을 두려워할수록 사교육 업계에선 오히려 일기 쓰기를 강조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몇몇 자기 주도 학습을 강조하는 학원이나 학습지 회사에선 '90일간 매일 일기 쓰기' 같은 식의 프로그램을 따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한 학습지 업체 교사는 "몇몇 방문 독서 지도 업체에서는 요즘 은밀하게 일기 과외를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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