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사의 신콜렉터]소년이여, 마음속에 아름다운 것만 가득찬 사람은 없다

이로사 칼럼니스트 2017. 9. 22. 20:5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영화 ‘몬스터 콜’

일러스트레이터 송철운 작가가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린 포스터. 소년이 상상 속에서 불러낸 몬스터의 손 위에 걸터앉아 서로 눈을 맞추며 밝게 웃는 따뜻한 모습을 표현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몬스터 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통 속에 살고 있는 12세 소년 코너 오말리에게 어느 날 밤 몬스터가 찾아온다. 몬스터는 소년에게 일종의 딜을 제안한다. 자신이 세 가지 진실된 이야기를 할 테니, 소년이 말하기 꺼리는 진짜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몬스터: 앞으로 너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코너: 이야기를 해준다고?

몬스터: 그래 세 가지 이야기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면, 너는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코너: 나는 이야기 같은 거 몰라!

몬스터: 네 번째 너의 이야기는 거짓이어선 안된다.

코너: 무슨 말이야?

몬스터: 너는 네가 숨기는 것, 너의 꿈, 악몽에 대해 말할 것이다.

코너: 안 해!

몬스터: 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 너의 진실이어야 한다.

웬일인지 소년은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약간 짜증 섞인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다. 그것은 아마 몬스터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소년의 내면에서 비롯한 창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이후 매일 밤 12시7분 몬스터가 나타날까 두려워하면서도 몬스터를 기다린다. 이 같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은 <몬스터 콜> 전체를 지배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영화의 원작인, 2012년 출간된 동명소설 <몬스터 콜스>는 청소년용 소설이지만 어른인 내게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영화보다 훨씬 어둡고 거친 톤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인상적인 이 책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안의 어둠, 감춰둔 진실을 대면하고자 했던 분투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라기엔 성숙하고, 어른이라기엔 어린 소년” 12세의 코너는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의 엄마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죽음의 짙은 그림자에 짓눌린 그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고,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빠는 재혼해 외국에 나가 있으며,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외할머니는 완고하며 불쾌한 존재다.

마음속에선 엄마의 병이라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일지만, 코너는 ‘죽음’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한다. 그는 선명히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들로 가득 찬 채 대체로 무언가에 꽉 눌려 있다. 그것은 소년이 매일 밤 꾸는 악몽, 감춰둔 진실과 관련이 있다. 자신만 아는 그 진실은 그에게 두려움, 죄책감, 슬픔, 분노 등의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런 소년에게 나타난 몬스터 역시 불확실한 존재다. <몬스터 콜>의 몬스터는 여느 어린이 영화에서처럼 소년의 적을 쓰러뜨려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 엄마의 죽음을 막아주려 하지도 않는다. 혹은 무찔러야 할 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몬스터는 그냥 밤 12시7분마다 무시무시하고도 인자한 얼굴로 찾아와 ‘너의 진실을 직면하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구나 몬스터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란 것은 전혀 명쾌하지 않다. 처음엔 관객도, 영화 속의 코너 자신도 이 이야기가 코너의 진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알아챌 수 없다. 그저 교훈적 동화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이야기 정도로만 보인달까? 착한 왕손은 사실 살인자이고, 농부의 순수한 딸은 이유 없이 죽고, 계모라고 다 나쁜 건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 이야기들은 단지 동화를 전복하는 ‘잔혹 동화’의 낡은 유행에 따르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세계가 불확실한 모순 덩어리라는 사실, 그냥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몬스터에게 네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게 됐을 때 소년은 모든 이야기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동시에 이야기란, 다시 말해 삶의 진실이란 “기대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 사나운 짐승”이란 것을 깨닫는다. 코너는 결국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쓸모없다고 여겼던 이야기의 힘을 빌려 말할 수 있게 된다.

파괴

소년이 종국에 커다란 고통을 받아들이고 끔찍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돕는 것은 이야기와 더불어 분노하고 파괴하는 행위다. 파괴적인 ‘어린이’ 캐릭터는 인상적이다. 코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마음대로 화내지 못한다. 이 시기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부족하며, 화낼 권리가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파괴의 욕구가 있다. 도입부, 엄마와 함께 오래된 영사기로 영화 <킹콩>을 보는 장면에서 코너는 “사람들 못됐다. 킹콩이 무슨 죄야? 킹콩이 다 박살내면 될 텐데. 인정사정없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예민하고 억압된 소년이 실컷 화내고 파괴하도록 내버려둔다. 몬스터는 코너가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고, 할머니의 골동품들을 때려 부수거나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투명인간 취급하는 친구를 때려눕히는 것을 돕는다. 죽어가는 엄마는 병상에서 “필요한 만큼 화를 내도 돼. 뭔가를 부숴야 한다면, 부디 제대로 속 시원히 부숴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발현된 소년의 분노는 그 자체로 제 할 일을 다한다. 코너의 분노는 십대의 사회에 대한 근원적 분노를 초능력물로 풀어낸 <크로니클>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동기 부여가 되는 <스파이더맨>처럼 영웅서사를 위한 도구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죄책감, 슬픔,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 벌어져야 했을 일일 뿐이다.

코너는 파괴의 결과로 벌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코너가 가진 비밀에서 비롯한 근원적인 죄책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의 힘든 상황을 아는 어른들은 그를 벌하지 않는다. 코너는 “저한테 벌 안 주실 거예요”라고 묻지만, 교장 선생님이나 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12세 코너가 가진 비밀은 뭐였을까? 짐작했겠지만 그것은 아픈 사람을 곁에 둔 많은 이들이 품는 생각, 엄마를 사랑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떠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죽어버렸으면 하는 모순적인 감정. 코너가 반복적으로 꾸던 악몽은 바로 거대한 구멍으로 빠지려는 엄마를 구하려고 애쓰다 결국 손을 놓아버리는 꿈이다.

<몬스터 콜>은 적인지 동지인지 모를 거대한 주목 나무의 형상을 한 괴물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소년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한 복잡한 자기모순을 직면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어른들이 잊고 있던, 아이의 분노·죄책감·슬픔 등 뒤섞인 감정을 표백 과정 없이 그려낸다. 어린이 영화치고는 확실히 어둡고 가차 없다.

<이로사 칼럼니스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