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뭔가는 버려야 얻을 수 있다, 떠돌기로 했으면 평온함을 버려야 한다

2017. 9. 2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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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선현경의 ‘잠시멈춤’

일러스트 | 이우일

요즘 짐을 싸고 있다. 서울의 집을 3년 동안 빌려주고 왔기에 어디에서건 월세로 지내야 한다. 이런 기간이 주어졌으니 알차게 떠돌자 마음먹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전기세, 수도세 등의 생활물가는 이곳이 서울보다 싸다. 이곳에서 제일 비싸다는 대학교육비나 의료비를 지출할 일이 없기에 그렇겠지만 뉴욕, 샌프란시스코, LA 같은 대도시만 아니라면 서울보다 생활비는 적게 드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래서 집을 빌려준 3년 동안은 미국에 있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한 지역에만 머무를 이유가 없다.

우리 부부가 뭔가를 결정할 때 아무런 이견 없이 맞는 게 하나 있다. ‘갈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가라!’ 그래. 다시 길을 떠나자. 그 덕에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다.

처음 낯선 곳에서 살아보자며 고민했을 때 생각했던 곳은 막연히 하와이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와이에서 살고 싶었다. ‘하와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향이 좋은 따끈한 커피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작정하고 머물러 본 적이 있었다. 날씨 좋고 한가하다. 긴장감 같은 건 길고양이도 필요 없는 휴양지다. 자다 일어나 헐렁한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몽환적인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진지한 삶이라는 게 가능할까. 여행이 아니라 잠시 살 곳을 찾고 있었기에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던 차에 딸이 거들었다. 여름뿐인 곳은 살기 싫다고. 딸은 유난히 추운 겨울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살피다 찾은 곳이 오리건주 포틀랜드였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계절이 다 있으며 물가가 비싸지 않은 곳. 포틀랜드는 얼결에 도착한 도시였다. 이곳에서 2년이나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도시의 편리함과 시골의 한적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모든 게 충족되었다.

저렴한 지역 음식점과 푸르른 공원이 블록마다 있다. 다양한 문화행사와 축제도 많다. 그럼에도 다운타운은 도시가 돌아가는 건지 의심이 들 만큼 인적이 드물다. 한적한 가게를 보면 저절로 장사 걱정이 될 정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생글거린다. 친절하고 평화롭다. 모든 게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 포틀랜드도 젠트리피케이션은 피할 수가 없나보다. 집값이 두 배 이상 올라 살 집을 잃은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탄한다. 옆 대도시의 큰 회사들이 포틀랜드로 이주할 계획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우리가 좋아하던 소규모의 가게들은 하나둘 사라진다. 작은 LP 가게나 앤틱 가게, 그리고 중고 자전거 가게나 소품 가게들은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외각으로 밀리고 있다. 도심의 오래된 낮은 건물이나 주차장이 헐리고 높은 빌딩들이 올라간다. 드높던 나무는 뽑히고 놀던 땅은 파내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유난히 시끄럽다. 당연하다. 이렇게 살기 좋고 문화적인 도시를 돈 있는 사람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다.

시민단체들이 모여 집값 오르는 걸 거부하는 운동이나, 대형 프랜차이즈 반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포틀랜드는 변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이 변하게 되는 걸까. 건축공사장 앞 조감도처럼 완성될 몇 년 후엔 이 도시가 꽤 낯설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틀랜드를 떠나기로 결심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딸은 원하던 대학이 있는 도시로 갔다. 그저 우리도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둘이서 몇 달 지내보니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포틀랜드에서 지낸 덕에 웬만한 헐렁함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럼 이제는 하와이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랬다. 가자. 하와이.

이곳에서 여유롭게 사는 법을 익힌 후라 이런 결정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섬에서 살게 되는 대신 여러 다른 비용을 치러야 하겠지만 더하고 빼면 해볼 만한 경험이다. 지금 해 보지 않는다면 영영 못할 수도 있다. 가 보자.

하와이로 이사를 결심하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하와이는 같은 미국이라도 법도 다르고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마저 달랐다. 본토와 떨어져 있어서인지 아예 다른 나라 같다. 2년이나 지내왔기에 이곳에서의 생활도 마무리해야만 한다.

여기선 포장이사의 개념이 없다. 비용을 더 들인다면 누군가가 와서 싸주긴 하겠지만, 모든 서비스에 인건비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사람을 쓰면 그만큼의 비용을 확실하게 지불해야 한다. 스스로 알아서 이사할 수 있는 이사용 트럭과 이사용품을 대여해 주는 업체가 수두룩하다. 그러다보니 싸들고 이사하는 것보다는 아예 팔고 가서 다시 사는 게 더 저렴하다. 그래서 개인이 물건을 사고파는 업체나 중고용품 가게가 발달한 모양이다.

우리도 몇 가지 필요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고 꼭 가져가야 할 물품들만 직접 싸기로 했는데, 집 안 잡동사니들이 전부 중고음반과 싸구려 음향기기다. 곧 중고물품 가게를 차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다. 남편이 가격이 싸다고, 배송비가 없다고 주워 모은 것들이 2년 동안 엄청나게 불어났다.

애써 모아온 게 먼지 쌓인 고물들이고 이제 우린 그것들 덕에 이사비용을 더 치러야 한다. 화가 났다. 마음을 다스리자. 간만에 요가 수업에 참석해 매트 위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이 가라앉자 뜬금없이 썰렁한 옛 노래 한토막이 떠올랐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이 노래 가사 속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인 서로에게 그저 잘했다 하며 마무리를 짓는다. 현명한 노래였다. 혼자 웃음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선택은 늘 그랬다. 뭔가를 얻는 게 아니라 뭔가를 버려야 얻을 수 있었다. 떠돌기로 선택했으면 평온한 삶은 버려야 했다. 뭐든 수집하는 남편을 선택했으니 간결한 삶은 버려야 한다. 많았던 짐을 상자에 넣으니 다시 간결한 집의 모양새가 보여 좋다. 그동안 지저분했기에 깨끗함이 한눈에 보인다. 좋구나. 그래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다. 그러게 내 남편이라지~다.

지난달 개기일식을 보았다. 미국 대륙에서 99년 만에 볼 수 있는 개기일식이었는데, 바로 이곳 오리건주에서 시작한다며 모두들 호들갑을 떨었었다. 지구, 달, 태양이 나란히 일직선으로 서는 일. 우주에서 달이 지구를 돌다보면 당연하고 우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무심히 지나치려 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개기일식 이야기를 했다. 특히 요가 선생님들이 그랬다.

더 완벽한 일식을 보기 위해 당일 수업을 취소하고 새벽에 세일럼(포틀랜드 조금 아래쪽에 있는 도시)으로 갈 예정이라는 행동파들이 꽤 많았다. 달에 완전히 가려졌다가 다시 나오는 태양은 그동안 우리가 봐 오던 그 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샤머니즘적인 요가 선생님도 있었다. 일식을 보며 하늘의 별자리와 우리의 관계를 다져야 한다는 점성술사 같은 요가 선생님도 있었다. 덕분에 점점 관심이 생겨 그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당일에는 괜히 긴장해 새벽에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일식이 일어나는 시간엔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남편이 안 깨웠더라면 못 볼 뻔했다.

우린 두 시간 남짓 되는 일식의 과정을 찬찬히 베란다에서 지켜보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달이 해를 베어 먹은 듯 가리기 시작하더니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서늘한 바람이 불며 자동센서가 달린 가로등들이 저절로 불을 밝혔다. 아침인데 땅거미가 지는 것 같았다. 날던 새들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개기일식엔 동물들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고 한다.

결국 그 작은 달이 커다란 태양을 가렸다. 그로 인해 어두워진 지구 위에 먼지같이 작은 우리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언제 바람에 날려 사라져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작은 우리가 이 커다란 우주에서 살고 있구나. 순간 생각이 멈추며 마음이 고요해졌다.

하와이로 가기로 결정한 뒤부터 이래도 되나 싶어 불안한 마음이었다. 이렇게 떠돌다 진짜 정착이 어려운 건 아닐지 겁도 났다. 하지만 호기를 부려보자. 알 수 없는 미래다. 감히 함부로 예단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

집 현관문을 열면 바로 남태평양의 바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살아 본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하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 곳은 비싸다. 자전거를 타고 바다에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살아보는 쪽으로 생각하니 예산에 맞는 저렴한 집들이 보인다. 날도 더운데 자전거로 너무 장시간 격렬하게 달리진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서 여기저기를 헤매며 집을 구하고 생활에 필요한 잡일들을 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하지만 인터넷의 아름다운 사진들로 상상해보는 하와이의 삶은 평화롭기만 하다.

찰리 채플린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잘 모르는 곳으로 가기 전이 즐거운 이유는 아마도 멀리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모르는 곳으로 떠날 생각으로 오늘을 산다. 상상을 즐길 수 있는 오늘을 가지고 싶어 늘 어디론가 떠날 궁리 중이다.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금은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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